17세기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로마의 교회와 성직자도, 파리와 마드리드의 왕실도, 런던의 국왕과 귀족도 한 화가의 그림을 원했다. 종교와 국경,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던 시대였지만 그의 작품은 유럽 여러 궁정과 도시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 화가가 바로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자화상〉.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루벤스는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국제적인 명성을 누린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에 머물지 않았다. 고전과 언어에 능통한 지식인이었고, 왕과 귀족을 상대하는 외교관이었으며, 수많은 주문을 조직적으로 처리한 거대한 공방의 운영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루벤스를 루벤스답게 만든 것은 화면 가득 넘쳐흐르는 생명력이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움직이고, 몸부림치고, 사랑하고, 고통받는다. 신과 인간, 전쟁과 평화, 권력과 욕망이 그의 화면 안에서는 모두 거대한 연극처럼 펼쳐진다. 

국경을 넘나든 화가의 탄생

 

루벤스는 1577년 오늘날 독일에 속하는 지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종교적·정치적 혼란을 피해 플랑드르를 떠나 있던 상태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족은 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고, 루벤스의 예술적 정체성도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소년 시절 그는 라틴어 학교에서 고전과 인문학을 배웠다. 이후 여러 화가의 문하에서 회화를 익혔고, 스물세 살이던 1600년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 선택은 그의 예술 인생을 결정지었다.

 

루벤스는 약 8년 동안 만토바와 베네치아, 로마, 제노바 등지를 오가며 르네상스와 고대미술의 정수를 몸으로 익혔다. 베네치아에서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풍부한 색채를 배웠고,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장대한 인체와 구성을 연구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도 탐구했으며 당시 새로운 회화의 길을 열고 있던 카라바조의 극적인 명암법도 받아들였다.

 

스페인 궁정을 방문하면서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소장한 방대한 미술품도 직접 접했다.

그 결과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남유럽 르네상스의 장엄한 구성과 플랑드르 회화 특유의 섬세한 질감, 베네치아의 색채, 카라바조의 명암, 고대 조각에서 배운 육체의 힘이 하나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한 지역의 회화를 넘어선 새로운 유럽적 회화였다. 

그림이 곧 외교였던 시대

 

1608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루벤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루벤스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붓을 다루는 능력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언어를 구사했고 고전과 역사, 정치에 대한 지식도 깊었다. 궁정의 예법에도 익숙했다. 당시 유럽의 왕과 귀족들에게 그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교양 있는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능력은 결국 그를 외교관의 길로 이끌었다.

 

루벤스는 스페인과 영국 사이를 오가며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양국의 평화를 위한 협상 과정에도 참여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북부 네덜란드를 둘러싼 평화협상에도 관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외교 활동이 그의 예술 활동과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왕과 귀족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림 주문이 이어졌다. 루벤스의 웅장하고 화려한 회화는 왕권과 권위를 표현하고자 했던 유럽 궁정의 요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는 어쩌면 그림으로 권력을 설득했던 사람이었다. 루벤스에게 그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신앙을 설득하고, 권력을 정당화하며,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였다.

 

십자가 위에 세운 바로크의 정신

 

루벤스의 예술적 성취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안트베르펜 성모대성당의 대형 제단화들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612~1614년경. 안트베르펜 성모대성당 / Public Domain

특히 〈십자가를 세움〉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과 거의 동의어처럼 알려진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소설 『플랜더스의 개』를 통해 더욱 친숙하다. 가난한 소년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작품이 바로 이곳의 루벤스 그림들이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십자가를 세움〉, 1610~1611년경. 안트베르펜 성모대성당 / Wikimedia

〈십자가를 세움〉 앞에 서면 무엇보다 화면 전체를 휘감는 움직임에 압도된다.

 

루벤스는 전통적인 삼면화의 세 패널을 각각 독립된 장면으로 나누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장면처럼 연결했다. 십자가는 강한 대각선을 이루며 위로 치솟고, 수많은 인물의 근육과 몸은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팽팽하게 긴장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 또한 극적이다.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남자들의 육체는 강렬한 힘을 드러내고, 그 한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단순한 희생자의 모습에 머물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도 장엄함과 정신적 힘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가톨릭교회가 반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추구했던 감동적이고 극적인 종교미술의 성격과도 맞닿아 있다.

 

신앙을 머리로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눈과 마음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크 예술이 추구한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였고, 루벤스는 이를 누구보다 강렬하게 실현했다.                 

신화를 살아 숨 쉬게 하다

 

루벤스는 종교화뿐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를 그린 작품에서도 독보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1617년경, 캔버스에 유채,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를 보면 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그러나 화면은 놀라울 정도로 역동적이다. 납치되는 여성들의 뒤틀린 몸과 공포에 찬 표정, 말을 제어하는 남성들의 힘찬 동작, 번쩍이는 갑옷과 말의 움직임이 서로 얽히면서 화면 전체가 폭발할 듯한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루벤스 회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쩌면 인간의 몸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남성과 여성, 젊음과 노년, 노동하는 사람과 귀족의 피부를 서로 다르게 표현했다. 구릿빛으로 단단한 남성의 피부와 혈관이 비칠 듯 부드러운 여성의 피부를 서로 대비시켰다. 오늘날에도 영어에서 풍만하고 곡선적인 육체미를 가리켜 ‘Rubenesque’라고 표현할 정도로 루벤스가 그려낸 신체의 이미지는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은 종종 실제 인간보다 더 크고 더 풍만하며 더 강렬하다. 그러나 바로 그 과장과 넘침이 루벤스 예술의 본질이었다. 그가 그린 세계는 현실보다 크고, 현실보다 격렬했다. 루벤스는 인간의 몸을 통해 삶의 욕망과 힘, 사랑과 고통을 모두 표현했다.

 

거대한 공방, 바로크 시대의 창작 스튜디오

 

루벤스의 명성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그의 작업실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주문이 밀려들었다. 교회에서는 대형 제단화를 주문했고, 왕실에서는 초상화와 역사화를 의뢰했으며, 귀족들은 신화와 사냥 장면을 원했다. 루벤스는 이 주문을 혼자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안트베르펜에 대규모 공방을 운영하며 숙련된 제자와 조수들과 체계적으로 작업했다. 루벤스가 구도와 기본적인 밑그림을 만들고 색채와 명암의 방향을 정하면 조수들이 작업에 참여하고, 중요한 부분이나 최종 단계에서는 루벤스가 다시 손을 대는 방식이었다.

 

동물이나 정물처럼 특정 분야에 능한 화가가 협업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하나의 거대한 예술 창작 스튜디오와도 같았다.

 

그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수많은 인력을 조직한 뛰어난 공방 운영자였다. 이러한 제작 방식 덕분에 루벤스와 그의 공방은 수많은 회화와 제단화, 초상화, 습작과 장식화를 남길 수 있었다. 예술가가 혼자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품 하나를 완성한다는 현대적 이미지와 달리, 당시의 대형 회화는 수많은 사람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루벤스는 그 시스템을 가장 성공적으로 운영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왕비의 삶을 신화로 만들다

 

루벤스의 정치적 감각과 회화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치 연작이다. 마리 드 메디치는 자신의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루벤스에게 대규모 연작을 주문했다. 루벤스가 제작한 24점의 작품에서는 실제 역사와 그리스·로마 신화, 우화적 상징이 자유롭게 결합된다.

 

왕비의 결혼과 정치적 사건, 왕실의 갈등 같은 현실의 이야기가 신들과 여신, 승리와 평화의 상징 속에서 장대한 역사극으로 다시 태어난다. 루벤스는 한 인간의 삶을 신화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정교한 이미지 정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왕실의 권위는 그림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넘어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루벤스는 권력이 어떤 이미지를 원하는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던 화가였다.

 

전쟁 속에서 평화를 꿈꾸다

 

그러나 루벤스를 단순히 왕과 귀족의 권력을 찬미한 화가라고만 이해하면 그의 예술 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는 30년 전쟁으로 유럽이 황폐해지는 모습을 직접 경험했다. 외교관으로 여러 나라를 오갔던 그는 전쟁이 정치적 지도 위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도시, 문화와 예술을 파괴하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알고 있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전쟁의 결과〉, 1638~1639년. 우피치미술관 소장

그러한 경험은 말년의 작품 〈전쟁의 결과〉, 흔히 〈전쟁의 공포〉라고도 불리는 그림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폭력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그를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전쟁의 광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쓰러지고 책과 악기, 건축과 예술을 상징하는 대상들이 파괴된다.

 

전쟁이 파괴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만이 아니다.

 

문화와 학문, 예술과 사랑, 인간이 오랜 시간 만들어온 문명 전체가 무너진다는 메시지가 화면 속에 담겨 있다. 왕과 군주의 영광을 그렸던 루벤스가 말년에 전쟁으로 파괴되는 유럽을 그렸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화가이자 외교관이었던 그는 누구보다 평화의 가치를 절실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300년을 넘어 이어진 영향력

 

루벤스는 1640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 이후 더욱 커졌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에서는 중요한 미술 논쟁이 벌어졌다.

한쪽은 푸생을 중심으로 형태와 데생, 이성과 질서를 강조했고, 다른 한쪽은 루벤스를 중심으로 색채와 감각, 회화적 표현을 강조했다. 이른바 푸생주의와 루벤스주의의 논쟁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루벤스주의적 색채관은 더욱 힘을 얻었고, 와토와 부셰를 비롯한 로코코 미술의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낭만주의 화가들에게도 루벤스는 중요한 선배였다.

 

들라크루아와 제리코는 그의 격렬한 운동감과 색채, 극적인 구성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이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여러 화가들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루벤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루벤스는 하나의 시대에 머문 화가가 아니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1830년 벨기에 독립 이후에는 루벤스가 새로운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안트베르펜 곳곳에서 오늘날까지도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오늘, 루벤스를 다시 본다는 것

 

루벤스의 그림 앞에 서면 때때로 우리는 낯섦을 느낀다.

 

지나치게 풍만한 몸, 지나치게 화려한 색채, 지나치게 격정적인 움직임.

그러나 바로 그 ‘과도함’ 속에 루벤스 예술의 힘이 있다.

그에게 인간의 삶은 조용히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도, 신앙도, 권력도, 전쟁도 인간에게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늘 움직인다.

기뻐하고,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의 화면에는 정지해 있는 생명이 거의 없다.

 

전쟁과 종교 갈등이 끊이지 않던 시대를 살았음에도 루벤스는 끝내 인간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4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작품이 우리를 압도하는 이유일 것이다.

 

삶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다.

때로는 전쟁과 갈등, 욕망과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루벤스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화면 속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몸과 빛을 그렸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지 화려한 바로크 회화만이 아니다.

 

삶이 아무리 무겁고 복잡해도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힘, 그리고 그 안에서 끝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발견하려는 시선.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루벤스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글 ㅣ 김진혁 한국취업경제신문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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