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궁의 한 방,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란히 걸어 나오고, 소크라테스와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가 저마다의 자세로 사유에 잠겨 있다. 수많은 인물이 한 화면 안에 모여 있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서로 다른 몸짓과 시선은 거대한 건축적 공간 속에서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

 

이 그림이 바로 《아테네 학당》이다.

 

그리고 이 장대한 벽화를 그린 화가는 세상을 떠났을 때 불과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의 이름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

라파엘로, 《자화상(Self-Portrait)》, 1504–1506년경, 패널에 템페라,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이미지: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전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세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후대에는 그를 ‘화가들의 군주(Prince of Painters)’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가 인간의 힘과 고뇌를, 레오나르도가 자연과 인간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보여줬다면 라파엘로가 도달한 세계는 조화와 균형이었다. 그의 그림에는 과장된 격정이 없다. 대신 완벽하게 정돈된 구성, 부드러운 색채, 우아한 인물의 움직임이 있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완성’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지다

 

라파엘로는 1483년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국가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반니 산티는 우르비노 궁정에서 활동하던 화가이자 시인이었다.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작업실과 궁정 문화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미술과 인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여덟 살 무렵 어머니를 잃었고, 열한 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작업장과 주변 화가들의 도움 속에서 화가로 성장했다.

 

젊은 라파엘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피에트로 페루지노였다.

과거에는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정식으로 수련했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오늘날에는 두 사람의 정확한 관계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분명한 것은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균형 잡힌 구성과 맑은 색채, 차분한 인물 표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라파엘로의 성장 속도는 놀라웠다. 10대 후반에는 이미 독립적인 화가로 인정받았고, 젊은 나이부터 제단화와 성화 제작을 맡았다.

 

1504년 무렵 그는 피렌체로 향한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새로운 미술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두 거장의 작품을 치열하게 연구했다. 레오나르도에게서는 인물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계와 부드러운 명암법을,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인체의 힘과 역동성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누구의 모방자로 머물지 않았다.

 

두 거장의 장점을 자신의 감각 속에 녹여내며 더욱 부드럽고 명료하며 균형 잡힌 회화 세계를 만들어갔다. 1508년,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향한 것이다.

 

바티칸에서 꽃핀 천재

 

라파엘로는 바티칸 궁의 교황 거처를 장식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맡았다. 이곳에서 탄생한 것이 오늘날 ‘라파엘로의 방(Stanze di Raffaello)’으로 불리는 벽화 연작이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09–1511, 프레스코, 바티칸 궁 서명의 방.  이미지: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아테네 학당》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학자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상상의 장면이다. 화면 중앙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란히 걸어온다.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땅을 향해 펼친다. 이 두 사람의 몸짓만으로도 이상과 현실, 정신과 경험이라는 서로 다른 철학적 세계가 표현된다. 주변에는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디오게네스 등 고대 지성사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놀라움은 인물의 숫자에 있지 않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등장하면서도 화면 전체가 한 치의 혼란 없이 질서를 유지한다는 데 있다. 원근법, 건축 공간, 인물의 움직임, 시선의 방향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거대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아테네 학당》은 단순히 철학자들의 집단 초상이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고대의 지성과 인간의 이성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선언에 가깝다. 그리고 그 중심에 스물여섯 살 안팎의 젊은 화가 라파엘로가 있었다.

 

대표작들, 완성을 향한 붓

 

라파엘로의 작품은 오랫동안 르네상스 회화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아테네 학당》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1509년에서 1511년 무렵 제작된 이 프레스코화는 바티칸 궁의 ‘서명의 방’에 자리하고 있다. 정교한 원근법과 인물 배치, 건축 공간의 구성은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가 도달한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시스티나 성모》 역시 라파엘로의 대표작이다.

라파엘로, 《시스티나 성모(Sistine Madonna)》, 1512–1513경, 캔버스에 유채,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이미지: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구름 위를 걸어오는 듯한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리고 화면 아래에서 턱을 괴고 위를 바라보는 두 천사의 모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 이 두 천사의 이미지는 원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익숙할 정도로 대중문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됐다.

 

《갈라테아의 승리》에서는 또 다른 라파엘로를 만날 수 있다.

라파엘로, 《갈라테아의 승리(The Triumph of Galatea)》, 1512경, 프레스코, Villa Farnesina, Rome. 이미지: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신화 속 님프 갈라테아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이 소용돌이치듯 움직인다. 안정적인 성모자상으로 익숙한 라파엘로의 작품과 달리, 역동적인 움직임과 강렬한 생명력이 돋보인다.

 

《라 포르나리나》는 더욱 개인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라파엘로,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 1518–1519경, 패널에 유채,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이미지: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젊은 여인의 초상을 담은 이 작품의 모델은 오랫동안 라파엘로의 연인으로 전해지는 여성과 연결돼 왔다. 그러나 그 인물의 정확한 신원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후대의 전승과 추정이 상당 부분 섞여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대작이 《그리스도의 변용》이다.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변용(The Transfiguration)》, 1516–1520, 패널에 유채, Pinacoteca Vaticana. 이미지: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라파엘로가 세상을 떠날 당시까지 작업이 이어지고 있던 작품으로, 그의 장례 때 작품이 함께 놓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면 위쪽에서는 빛에 휩싸인 그리스도의 변용이 펼쳐지고, 아래쪽에서는 고통받는 인간들이 극적인 몸짓을 보여준다. 천상과 지상, 구원과 고통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강렬하게 대비된다. 라파엘로가 평생 추구했던 조화의 세계가 마지막 순간에는 더욱 극적인 인간의 감정과 만나고 있었다.

 

화가를 넘어 로마 예술계를 움직이다

 

라파엘로의 위대함은 그림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공방을 운영하는 뛰어난 조직가이기도 했다. 교황청으로부터 대규모 작업을 연이어 맡으면서 많은 제자와 조수들을 이끌었고, 자신의 구상과 화풍을 여러 사람이 함께 구현할 수 있는 작업 체계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라파엘로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많은 작품과 프로젝트를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역할은 점차 화가의 범위를 넘어섰다.

 

1514년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세상을 떠난 뒤 라파엘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프로젝트의 책임을 이어받았다. 또한 고대 로마의 건축물과 유적을 조사하고 보존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고대 유적의 석재가 새로운 건축물을 짓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고대 로마의 유적을 기록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화가이자 건축가였을 뿐 아니라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라파엘로는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린 천재가 아니었다.

 

로마의 예술과 건축, 고대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함께 이끌었던 종합적인 예술가였다.

 

왜 그는 ‘화가들의 군주’인가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는 인간의 힘과 비극이 폭발한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는 끝없이 질문하는 지성이 느껴진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조금 다르다. 

그의 화면에서는 서로 다른 요소들이 다투지 않는다.

 

인물과 인물, 건축과 공간, 색과 선이 서로를 억누르지 않으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이것이 라파엘로 예술의 핵심이다.

 

조화와 균형.

 

쉬워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다. 수세기 동안 유럽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라파엘로의 작품이 이상적인 회화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어떻게 인물을 배치해야 하는지, 어떻게 공간을 구성해야 하는지, 어떻게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와 같았다. 그러나 완벽한 조화 때문에 오히려 라파엘로를 지나치게 온화한 화가로 보는 시선도 있었다.

 

19세기 이후 낭만주의와 근대미술이 강렬한 개성과 파격을 중시하면서 그의 예술은 때때로 너무 완벽하고 너무 고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아테네 학당》 앞에 사람들이 멈춰 서는 이유는 분명하다. 완벽하게 짜인 화면 속에서도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질서는 생명력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개별 인물을 하나의 세계로 묶어준다.

라파엘로가 보여준 조화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질서였다.

 

서른일곱 살에 멈춘 시간

 

라파엘로는 1520년 4월 6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성 금요일이었다.

전통적으로 그의 생일 역시 4월 6일로 알려져 있어, 태어난 날과 같은 날짜에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확정되지 않았다.

 

당대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는 라파엘로의 죽음을 그의 연애 생활과 연결해 설명했지만,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후대에는 감염성 질환이나 당시의 의료 처치가 그의 상태를 악화시켰을 가능성 등 여러 가설이 제기돼 왔다.

 

확실한 것은 그의 죽음이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는 것이다. 라파엘로는 자신의 뜻에 따라 로마 판테온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뜻의 라틴어 문장이 새겨져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자연은 그에게 정복당할까 두려워했고, 그가 죽자 자신도 함께 죽을까 두려워했다.”

 

그만큼 당대 사람들에게 라파엘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쟁할 수 있는 화가로 여겨졌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사랑과 전설 사이

 

라파엘로의 이름과 함께 가장 많이 전해지는 사랑 이야기는 《라 포르나리나》의 모델과 관련돼 있다. 후대의 전승에서는 그녀를 로마의 제빵사 딸 마르게리타 루티로 보고, 라파엘로의 연인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라파엘로가 여러 성모상의 모델로 그녀를 그렸다는 이야기 역시 오랫동안 반복돼 왔지만, 이를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가 1514년 무렵 추기경 베르나르도 도비치 다 비비에나의 조카 마리아 비비에나와 약혼했던 것은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결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혼인하지 않은 채 생을 마쳤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의 짧은 생애와 《라 포르나리나》를 연결해 하나의 낭만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천재의 삶에는 언제나 전설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전설을 걷어내고 바라봐도 라파엘로의 삶은 충분히 극적이다. 서른일곱 해 동안 그는 화가, 건축가, 공방의 책임자, 고대 유적의 조사자로 살아갔다. 교황 두 명의 시대를 지나며 바티칸을 장식했고, 수많은 작품과 건축 계획을 동시에 진행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천재성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수하는 집중력과 성실함이 있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이름

 

오늘날 라파엘로의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세계적인 미술관과 교회,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 시장에 등장하는 작품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가치를 경매 가격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이후 500년 동안 수많은 화가들이 그의 그림을 공부하고 모방하고 다시 해석했다는 데 있다.

 

라파엘로의 작품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었다.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인간 중심의 세계관, 고전 문화에 대한 존경, 아름다움과 질서에 대한 믿음이 그의 그림 속에서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얻었다. 어쩌면 라파엘로의 진짜 위대함은 새로운 것을 발명한 데만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존재하던 수많은 요소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결합해 누구도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기준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500년을 건너온 붓끝

 

라파엘로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넘었다.

 

그 사이 미술은 수없이 변했다. 원근법은 해체됐고, 아름다움이라는 개념도 달라졌다. 화가는 캔버스를 떠나 영상과 설치, 디지털 세계로 향했다. 그럼에도 바티칸의 《아테네 학당》 앞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서 있다. 그림 속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향해 손을 펼친다.

 

수많은 철학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토론한다.

그리고 그 모든 차이는 한 공간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서른일곱 해의 생애.

그러나 그가 만든 질서는 오백 년을 넘어 살아남았다.

 

완성이라는 말은 쉽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그림 앞에서는 그 말을 한 번쯤 허락해도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은 오늘도 《아테네 학당》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한 인간이 서른일곱 해 동안 붓끝으로 만들어낸 세계를 바라본다.

글 ㅣ김진혁 한국취업경제신문 부회장

김진혁 칼럼니스트 kimjinhyu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