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음반을 고르는 일은 때로 음악 한 곡을 선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음반의 표지를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음악을 들으며,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의 예술가들이 뜻밖의 지점에서 만나는 순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할 한 장의 음반은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 기타리스트 짐 홀(Jim Hall)이 1995년에 발표한 앨범 『Dialogues』다. 그리고 이 음반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1911년 작품 ‘Impression III (Concert)’다.
한 사람은 색채와 선으로 음악을 그렸고, 또 한 사람은 기타의 음과 침묵 사이에 그림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칸딘스키와 짐 홀. 두 예술가의 만남은 그래서 단순한 앨범 디자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앨범 개요

짐 홀(Jim Hall) 1995년 앨범 “Dialogues”
앨범명:『Dialogues』
아티스트: Jim Hall
발표연도: 1995년
장르: Jazz
형식: 짐 홀을 중심으로 여러 연주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재즈 앨범
앨범 커버 작품: Wassily Kandinsky, ‘Impression III (Concert)’, 1911
주요 참여 연주자: Bill Frisell, Gil Goldstein, Tom Harrell, Joe Lovano, Mike Stern, Scott Colley, Andy Watson 등
감상 포인트:화려한 속주보다 여백과 음색, 화성의 흐름, 연주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귀 기울여볼 만한 음반
감상곡: Jim Hall – ‘Simple Things’
칸딘스키, 음악을 그림으로 옮긴 화가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앨범 표지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미술이론가로, 현대 추상미술을 연 대표적인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걸은 인물이 아니었다.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강의했지만, 인상주의 회화와 음악의 영향을 받으면서 미술가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독일 뮌헨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고 표현주의와 추상예술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사물의 외형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하느냐가 아니었다. 칸딘스키는 색채와 선, 형태 그 자체가 인간의 감정과 정신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상의 형태를 점차 제거하고 선과 색채, 기하학적 요소만으로 화면을 구성하면서 그는 회화를 독립적인 시각 언어로 끌어올렸다. 특히 음악의 리듬과 울림, 정신적 상징을 회화 안으로 끌어들여 이른바 ‘보이는 음악’을 추구했다.
1922년에는 바우하우스 교수로 초빙돼 색채와 형태 이론을 가르쳤으며, 이후 기하학적 추상 양식을 더욱 깊이 발전시켰다. 1933년 나치 정권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뒤에는 프랑스로 이주해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미술세계는 이후 추상예술과 표현주의, 현대 디자인과 미디어아트에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Impression III (Concert)’…음악을 들은 뒤 태어난 그림
『Dialogues』의 커버에 사용된 작품은 칸딘스키의 1911년작 ‘Impression III (Concert)’다. 이 작품은 원색이 강조된 색채의 조화 속에서 칸딘스키의 추상 양식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림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넓은 노란색 화면이 시야를 지배한다. 그 위로 검정과 파랑, 빨강, 흰색이 거칠면서도 힘 있게 맞부딪힌다. 구체적인 대상을 정확히 그리려는 의도보다는 색과 색, 선과 면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과 움직임이 훨씬 중요하다.
화면 중앙과 왼쪽의 짧고 굽은 검은 선들은 마치 객석의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음악에 반응하는 몸의 움직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위쪽의 커다란 검은 형태는 피아노나 무대의 한 부분을 연상시키지만, 칸딘스키에게 그것이 무엇을 정확히 묘사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색이 어떻게 울리고, 형태가 어떤 리듬을 만들어내는가이다.
노란색은 밝은 금관악기처럼 터져 나오고, 짙은 검정은 낮고 묵직한 베이스처럼 화면을 붙잡는다. 파란색과 흰색의 곡선에서는 마치 멜로디가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속도감이 느껴진다.
이 작품이 짐 홀의 음반 표지로 사용됐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화려함 대신 여백을 연주한 기타리스트, 짐 홀
짐 홀은 1930년 12월 4일 미국에서 태어나 2013년 12월 10일 세상을 떠난 재즈 기타리스트다. 섬세한 화성 감각과 절제된 즉흥연주, 그리고 뛰어난 작곡·편곡 능력으로 재즈 기타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클리블랜드 음악원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한 그는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고, 1950년대부터 미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짐 홀의 기타에는 흔히 생각하는 ‘기타 영웅’의 모습이 거의 없다. 빠른 속주로 상대를 압도하거나 현란한 테크닉을 과시하기보다는, 한 음을 어디에 놓을 것인지, 그리고 다음 음까지 얼마나 많은 공간을 남겨둘 것인지가 더 중요했다.
짐 홀의 강점은 빠른 속주나 화려한 테크닉보다는 공간을 살리는 터치와 선율의 움직임을 통해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짐 홀 음악의 핵심이다. 그의 기타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순간에 한마디를 건넨다. 그리고 상대 연주자의 말을 기다린다. 그가 남긴 음 사이의 빈 공간은 결코 비어 있지 않다. 그 안에는 다음 선율에 대한 긴장과 다른 악기의 반응, 그리고 듣는 사람이 스스로 음악을 완성할 수 있는 여백이 들어 있다.
연주가 아니라 ‘대화’
앨범 제목이 『Dialogues』, 즉 ‘대화들’이라는 사실은 짐 홀의 음악 세계를 매우 잘 설명한다.
이 앨범은 기타가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독주자의 음반이라기보다는 여러 연주자와 서로 듣고 반응하며 만들어가는 음악에 가깝다.
앨범 커버에는 Bill Frisell, Gil Goldstein, Tom Harrell, Joe Lovano, Mike Stern 등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으며, 베이스의 Scott Colley, 드럼의 Andy Watson도 참여자로 표시돼 있다.
짐 홀의 기타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개성과 음악 언어를 가진 연주자들이 만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은 음을 연주하느냐가 아니다. 질문이 있으면 대답하고,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듣고, 필요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더한다.
그것이 재즈이고, 그것이 『Dialogues』다.
짐 홀이 수십 년 동안 보여준 연주 철학 역시 이러한 ‘대화’와 맞닿아 있다. 빌 에반스, 소니 롤린스와 함께했던 ‘재즈 기타의 스승’ 짐 홀의 음악적 궤적은 현대 재즈사의 중요한 장면들과 겹친다.
그는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 리 코니츠(Lee Konitz), 빌 에반스(Bill Evans) 등과 연주했으며, 1960년에는 뉴욕에서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아트 파머(Art Farmer)와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그의 연주가 특별했던 이유는 다른 연주자와 함께할 때 더욱 분명해졌다.
짐 홀은 자신의 기타를 다른 악기보다 앞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음을 듣고 그 사이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의 기타는 솔로 악기이면서 동시에 앙상블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그가 오랜 세월 수많은 후배 기타리스트들에게 ‘스승’과 같은 존재로 평가받은 것도 단순히 테크닉 때문만은 아니다.
재즈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듣는 법, 그리고 다른 연주자의 공간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방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짐 홀은 1997년 뉴욕 재즈 비평가상을 받았고, 2006년에는 슈발리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생전에 수많은 연주자들과 협업하며 후배 재즈 기타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칸딘스키의 색과 짐 홀의 음 사이
다시 앨범 표지로 돌아가 보자.
칸딘스키는 색채를 음악처럼 사용했다. 짐 홀은 소리를 그림처럼 배치했다.
칸딘스키의 화면에서 노란색과 검정, 파랑과 빨강이 서로 밀고 당기며 리듬을 만들어내듯, 짐 홀의 기타 역시 음과 음 사이, 기타와 다른 악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표현 방법은 전혀 다르지만 두 예술가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
칸딘스키의 그림에서는 구체적인 대상이 사라지면서 관객이 색과 형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짐 홀의 음악에서도 불필요한 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청자는 그 여백에 자신의 감정을 채운다.
그래서 『Dialogues』의 커버와 음악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칸딘스키의 화면은 격렬하고 화려하다. 반면 짐 홀의 기타는 차분하고 절제돼 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는 모두 리듬과 감정, 긴장과 해방이라는 동일한 예술의 언어가 흐른다.
다가오는 가을을 기다리며 듣는 한 장
『Dialogues』를 “짐 홀의 연주를 차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앨범”, 그리고 “다가오는 가을을 기다리며 잔잔하게 들을 수 있는 앨범”이다.
이 표현은 이 음반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가을은 소리가 작아지는 계절이다. 여름의 뜨거움과 소란이 한걸음 물러나면 작은 소리와 긴 침묵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짐 홀의 기타는 바로 그런 시간과 잘 어울린다. 그의 연주에서는 기타 현이 울리는 순간뿐 아니라 울림이 사라진 이후의 시간까지 음악이다.
특히 ‘Simple Things’를 들으며 앨범 표지의 칸딘스키 작품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감상법이다. 노란색의 넓은 면과 검은색의 깊은 공간, 그 사이를 가르는 파랑과 빨강의 움직임을 천천히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림의 선이 기타의 멜로디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반드시 귀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그림을 본다는 것 역시 눈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다.
칸딘스키가 평생 꿈꾸었던 ‘보이는 음악’과 짐 홀이 남긴 절제된 기타의 언어가 한 장의 음반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음악을 바라보고 그림을 듣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찬란한 원색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재즈 기타의 스승 짐 홀.
1995년의 『Dialogues』는 음악과 미술이 서로 다른 예술이 아니라 결국 인간의 감정과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언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 그대로 ‘눈으로 즐기며 듣는 이 한 장의 음반’이다.
글 ㅣ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KANN 블로그 바로가기
https://blog.naver.com/kanlimmtaik/224381441191





댓글을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