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음반에는 음악만 담기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한 시대의 미술과 영화, 한 예술가의 삶과 또 다른 예술가의 음악적 궤적이 작은 사각형의 앨범 재킷 안에서 만난다. 라이 쿠더(Ry Cooder)의 1980년 앨범 『Borderline』은 그런 음반이다.

앨범 표지 한가운데에는 검은 황소와 붉은 천을 든 인물이 팽팽하게 맞서는 투우 장면이 자리한다. 거칠게 돌진하는 황소와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는 인물의 동작에는 긴장과 위험, 관능과 생명력이 동시에 흐른다. 이 강렬한 이미지는 스페인 출신 화가 카를로스 루아노 료피스(Carlos Ruano Llopis, 1878~1950)의 작품이다.
료피스는 발렌시아의 산 카를로스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09년 지역 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금메달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이어갈 수 있는 장학금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을 결정한 것은 무엇보다 투우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었다. 한때 투우사를 꿈꾸었던 그는 결국 투우사의 길을 포기했지만, 그 열망은 화폭 속에서 더욱 뜨겁게 살아났다.
그의 투우 그림은 단순한 구경꾼의 시선으로 그려진 작품이 아니었다. 실제 투우사 가운데는 그의 작품을 보고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투우를 해 본 적이 없지만 투우를 할 줄 안다”고 평할 정도였다. 황소의 질주, 인간의 순간적인 몸놀림, 붉은 천의 움직임과 경기장을 감도는 죽음의 긴장을 그는 놀라울 만큼 사실적이고 인상적으로 포착했다.
1912년에는 투우를 소재로 한 그의 유화가 석판으로 제작됐고, 이듬해인 1913년에는 유명 투우사의 은퇴를 알리는 마지막 투우 포스터에도 활용됐다. 이후 작품은 발렌시아와 마드리드, 빌바오, 마르세유를 거쳐 파리까지 소개됐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활동 무대가 미대륙으로 확장됐다. 뉴욕과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작품을 선보였고 멕시코로 이주해 활동했다. 영화와도 인연이 있어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투우 장면에 관여하고 영화 『피와 모래』 홍보 포스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런 료피스의 격렬한 투우 이미지가 라이 쿠더의 『Borderline』 표지를 장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 속한 두 예술가 사이에는 의외로 닮은 점이 있다. 료피스가 투우라는 전통 속에서 순간의 긴장과 생명력을 끌어냈다면, 라이 쿠더 역시 미국의 오래된 블루스와 컨트리, 포크, 루츠 음악 속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음악적 생명력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블루스와 컨트리의 경계를 넘나든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는 194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음악 세계를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블루스와 컨트리, 월드뮤직, 루츠록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통음악을 자신의 기타 연주 안에서 새롭게 연결해 온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특히 슬라이드 기타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연주는 그의 이름을 세계 음악사에 각인시켰다.

라이 쿠더의 음악에는 화려한 기교를 앞세우는 기타리스트와는 다른 깊이가 있다. 그의 기타는 자신을 과시하기보다는 노래와 전통을 살려내는 역할을 한다. 블루스의 거친 숨결, 컨트리 음악의 소박한 정서, 멕시코와 쿠바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전통음악이 그의 기타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의 첫 번째 앨범 『Ry Cooder』는 ‘아메리칸 루츠록’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소개될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원숙한 슬라이드 기타와 미국 전통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결합하면서 라이 쿠더만의 음악적 방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1980년 발표된 『Borderline』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제목 그대로 ‘경계선’을 뜻하는 ‘Borderline’은 라이 쿠더의 음악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처럼 들린다. 그는 블루스와 록의 경계, 대중음악과 전통음악의 경계, 미국 음악과 다른 지역 음악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갔다. 어느 하나의 영역에 머물기보다 서로 다른 음악적 전통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특징이었다.
영화의 장면을 음악으로 바꾸다
라이 쿠더의 재능은 음반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영화음악에서도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The Long Riders』, 『Street of Fire』, 『Paris, Texas』 등 여러 영화의 음악을 통해 영상과 음악을 결합하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줬다.
특히 『Paris, Texas』에서 들려오는 그의 기타는 영화의 황량한 풍경과 고독을 그대로 품고 있는 듯하다. 슬라이드 기타 한 음 한 음이 광활한 사막과 인간 내면의 쓸쓸함을 그려내며, 라이 쿠더의 음악이 얼마나 회화적이고 서사적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음악적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름이 『Buena Vista Social Club』이다. 쿠바의 노장 음악인들과 함께 만들어낸 이 프로젝트는 라이 쿠더의 경력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업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 프로젝트의 탄생을 이끈 핵심 인물로 소개됐으며,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도 등장했다.
여기에서 라이 쿠더의 본질이 다시 드러난다. 그는 다른 음악문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흡수하는 음악가가 아니라, 그 음악이 가진 본래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중개자에 가까웠다. 오래된 음악을 현대의 청중에게 소개하되 그 뿌리와 질감을 훼손하지 않는 태도는 그의 음악적 품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취는 여러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1980년 제6회 LA 비평가협회상 음악상, 1999년 제25회 LA 비평가협회상 다큐멘터리상, 2004년 제46회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팝 인스트루멘탈 앨범, 2023년 제65회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트레디셔널 블루스 앨범 부문에서 수상했다.
앨범 재킷에서 만나는 두 예술가
『Borderline』의 앨범 재킷을 다시 바라보면 료피스의 그림과 라이 쿠더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인다.
검은 황소와 인간이 맞서는 순간에는 거칠고 원초적인 에너지가 있다. 붉은 천의 움직임에는 리듬이 있고, 황소의 돌진에는 박자가 있으며, 인물의 몸짓에는 즉흥적인 긴장감이 존재한다. 마치 블루스 연주자가 정해진 구조 안에서 순간순간 자신의 감정을 밀어 넣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투우 역시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오랜 규칙과 형식 속에서도 매 순간의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라이 쿠더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블루스와 컨트리라는 오래된 전통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의 기타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쉽게 예상할 수 없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그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한다.
그 점에서 『Borderline』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앨범명이 아니라 라이 쿠더의 음악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언어가 된다. 그의 음악은 늘 경계 위에 있었다. 블루스와 컨트리 사이, 포크와 록 사이, 미국과 멕시코 사이, 미국과 쿠바 사이, 대중음악과 영화음악 사이였다.
그러나 라이 쿠더는 그 경계를 나누는 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음악이 만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한 장의 음반이 들려주는 것
『Borderline』은 1980년에 발표된 라이 쿠더의 앨범이며, 앨범 커버에는 카를로스 루아노 료피스의 역동적인 투우 작품이 사용됐다.
이 한 장의 음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음악과 미술이 서로 다른 예술이라는 생각이 잠시 흐려진다. 화가는 붓과 색으로 움직임을 기록하고, 음악가는 기타와 소리로 감정을 기록한다. 료피스가 화폭 위에서 황소와 인간의 숨 막히는 순간을 붙잡았다면 라이 쿠더는 기타 줄 위에서 미국과 세계의 오래된 음악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을 붙잡았다.
그래서 『Borderline』의 앨범 표지는 음악을 듣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음악처럼 다가온다. 검은 황소의 돌진, 붉은 천의 흔들림, 인간의 몸짓에는 리듬이 있다. 그리고 음반을 재생하는 순간 그 화면 밖에서 라이 쿠더의 기타가 이어진다.
한 사람은 투우장을 그렸고, 한 사람은 기타를 연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붙잡으려 했던 것은 어쩌면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라지기 직전의 한순간, 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생명력이다.
앨범 개요
앨범명 : 『Borderline』
아티스트 : Ry Cooder(라이 쿠더)
발표연도 : 1980년
주요 음악적 배경 : 블루스, 컨트리, 루츠록, 미국 전통음악
앨범 커버 작품 : 카를로스 루아노 료피스(Carlos Ruano Llopis)의 투우 작품
주요 특징 :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한 라이 쿠더 특유의 기타 연주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적 감각
관련 활동 : 『The Long Riders』, 『Street of Fire』, 『Paris, Texas』 영화음악, 『Buena Vista Social Club』 프로젝트 등
글 ㅣ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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