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을 듣는 즐거움에는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장의 LP를 손에 들고 커버를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음악을 상상하는 일 역시 아날로그 음반이 주는 특별한 미학이다. 때로는 앨범 커버 한 장이 음악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먼저 들려주기도 한다.

오늘 소개하는 음반은 키보드 연주자 패트릭 모라즈(Patrick Moraz)와 드러머 빌 블루포드(Bill Bruford)가 단 두 사람만의 호흡으로 완성한 1983년 앨범 『Music For Piano And Drums』다.
제목 그대로 피아노와 드럼을 위한 음악이다. 화려한 밴드 편성도, 복잡한 악기 구성도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음악적 역량만으로 채워진 이 음반은 오히려 악기가 많을 때보다 더욱 풍성하고 깊은 음악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두 연주자가 얼마나 치밀하게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움직임을 그린 랄프 아우그스부르거의 앨범 커버
이 음반에서 음악 못지않게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앨범 커버다.
커버 작품의 작가는 랄프 아우그스부르거(Ralph Augsburger)다. 그는 1932년 스위스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태어났으며, 16세에 현지 미술학교에 입학해 조각가 레옹 페랭(Leon Perrin)에게 배웠다. 이후 유럽을 비롯해 타히티, 호주, 아프리카, 미국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장기간 체류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넓혀갔다.
다양한 문화와 환경 속에서 경험한 여행과 작업, 끊임없는 예술적 실험은 그의 시야를 확장시켰다. 야수파와 인상주의의 영향을 거친 그는 결국 삶의 지속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발전시켰다.
『Music For Piano And Drums』의 커버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선명하다.
여러 인간의 형상이 겹치고 흩어지며 앞으로 움직이는 듯한 모습은 마치 한 인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속적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한 화면 안에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푸른색과 검은색, 갈색, 붉은색 계열의 선들이 서로 중첩되면서 인체는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에너지로 표현된다.
아우그스부르거는 인체의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드로잉하면서도 선을 지나치게 채우지 않는다. 리드미컬하면서 절제된 선, 그리고 넓은 여백을 활용해 화면 속 인물이 지금도 계속 움직이고 있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 커버야말로 모라즈와 블루포드의 음악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피아노와 드럼, 두 악기의 음이 서로 겹치고 밀려나고 다시 만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패트릭 모라즈, 전자 키보드를 내려놓고 피아노 앞에 앉다
패트릭 모라즈는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의 중요한 흐름 속에서 활동해온 키보드 연주자다. 그는 예스(Yes)와 무디 블루스(The Moody Blues)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솔로 앨범을 발표하는 한편 여러 뮤지션의 음반에 게스트로 참여하며 폭넓은 음악 활동을 펼쳤다.
모라즈의 연주는 단순히 테크닉을 과시하는 방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서정적이며 오밀조밀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중요한 특징이다. 특히 『Music For Piano And Drums』에서는 일반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신시사이저나 전자 키보드를 과감하게 배제한다. 대신 고전적인 어쿠스틱 피아노만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 보인다.
전자음향의 장식 없이 오직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닌 자연스러운 울림과 깊이, 때로는 장엄함까지 끌어낸다. 건반을 두드리는 순간 발생하는 피아노 고유의 원음과 연주자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섬세한 뉘앙스가 그대로 전달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음반에서 모라즈의 피아노는 단순한 멜로디 악기가 아니다. 때로는 선율을 만들고, 때로는 리듬을 제공하며, 때로는 드럼과 대등한 위치에서 음악 전체의 구조를 만들어간다.
빌 블루포드, 드럼으로 멜로디를 연주하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빌 블루포드가 있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물론 록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블루포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드러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킹 크림슨(King Crimson), 예스(Yes), UK 등에서 활동했으며, 알 디 메올라(Al Di Meola), 알란 홀스워스(Allan Holdsworth) 등 수많은 정상급 연주자들과 협연하며 자신의 음악적 존재감을 증명했다.
블루포드의 가장 놀라운 능력은 단순히 정확한 박자를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그는 리듬을 '연주'하는 드러머이면서 동시에 리듬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는 연주자다. 더욱이 본래 타악기인 드럼에서 마치 선율 악기를 연주하듯 멜로디컬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드럼은 흔히 다른 악기를 뒷받침하는 리듬 악기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블루포드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드럼 역시 독립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악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의 연주는 때로 피아노의 음 사이에 작은 틈을 만들고, 때로는 피아노가 던지는 선율을 받아 새로운 리듬으로 변환한다. 또 어느 순간에는 드럼이 먼저 길을 열어주고 피아노가 그 뒤를 따라간다.
『Music For Piano And Drums』에서 블루포드는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보다 모라즈의 피아노가 가장 잘 살아날 수 있도록 뛰어난 음악적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조력'은 결코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다. 피아노와 대화를 나누며 음악을 공동으로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두 악기가 만들어내는 음악적 대화
이 앨범의 가장 큰 매력은 결국 두 사람 사이의 호흡이다.
피아노와 드럼이라는 서로 다른 악기가 어떤 순간에는 충돌하고, 어떤 순간에는 하나로 합쳐진다. 피아노가 서정적인 선율을 펼치면 드럼은 그 밑에 일정한 박자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대신 미세하게 반응한다. 반대로 블루포드가 복잡한 리듬을 만들어내면 모라즈의 피아노 역시 그 리듬을 받아 새로운 방향으로 음악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다 보면 '반주자와 솔리스트'라는 일반적인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누가 앞에 있고 누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역할을 바꾸고 서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한다. 바로 이 점에서 『Music For Piano And Drums』는 단순한 듀오 앨범을 넘어선다.
두 명의 뛰어난 연주자가 최소한의 악기 편성을 통해 얼마나 넓은 음악적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앨범에 수록된 ‘Children's Concerto’ 역시 두 연주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모라즈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서정적인 피아노와 블루포드의 예측하기 어려운 리듬이 결합하면서, 단순히 피아노에 드럼이 반주하는 음악이 아니라 두 악기가 서로를 자극하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간다. 자료에서도 이 곡의 유튜브 감상 링크를 별도로 소개하고 있다.
정적인 음반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음악
다시 앨범 커버를 바라본다.
아우그스부르거가 그려낸 인체는 한곳에 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앞으로 움직인다. 하나의 몸이 여러 개의 잔상으로 분리되어 있는 듯하고, 서로 다른 시간의 움직임이 한 화면에 동시에 존재하는 듯하다. 이 모습은 빌 블루포드의 드럼을 연상시킨다. 일정한 리듬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매 순간 조금씩 달라지고, 변화한다. 동시에 패트릭 모라즈의 피아노 역시 그 틈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한다.
선과 선 사이의 여백은 음과 음 사이의 침묵처럼 느껴진다.
좋은 음악은 음을 많이 채운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소리를 내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 침묵해야 하는지를 아는 연주자가 좋은 음악을 만든다. 아우그스부르거의 그림이 선과 여백으로 움직임을 만들어내듯, 모라즈와 블루포드는 소리와 침묵을 활용해 음악 속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Music For Piano And Drums』의 앨범 커버와 음악은 서로 잘 어울린다.
하나는 눈으로 바라보는 리듬이고, 다른 하나는 귀로 듣는 움직임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Flags』로 이어졌다
이 앨범을 통해 만들어낸 호흡과 성과는 두 연주자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2년 뒤인 1985년, 두 번째 협연 앨범 『Flags』를 발표하며 다시 만났다.
첫 번째 앨범 『Music For Piano And Drums』가 어쿠스틱 피아노와 드럼을 중심으로 두 연주자의 순수한 음악적 대화에 집중했다면, 두 번째 협연에서는 일렉트릭 사운드로 영역을 확장해 또 다른 음악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사람의 특별한 음악적 관계를 처음 만나는 청자라면 역시 『Music For Piano And Drums』부터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단 두 사람뿐이다.
피아노 한 대와 드럼 한 세트.
그러나 그 두 악기 사이에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역사와 재즈적인 즉흥성, 클래식 피아노가 지닌 울림, 그리고 두 정상급 연주자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음악적 경험이 함께 존재한다.
음악이 반드시 많은 악기와 거대한 편성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뛰어난 연주자 두 사람이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 순간 음악은 아우그스부르거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겹치고, 흔들리고, 흩어지고, 다시 만나며 끊임없이 앞으로 움직인다.
그것이 모라즈와 블루포드가 『Music For Piano And Drums』에서 들려주는 피아노와 드럼, 단 두 사람만의 앙상블이다.
글 | 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음반 정보
앨범명 : 『Music For Piano And Drums』
아티스트 : Moraz · Bruford
연주 : Patrick Moraz – Piano / Bill Bruford – Drums
발표 : 1983년
앨범 커버 아트 : Ralph Augsburger
추천 감상곡 : ‘Children's Concerto’
후속 협연작 : 『Flags』(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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