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의 표지는 음악을 듣기 전에 만나는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음반에 담긴 정서와 세계관을 압축해 보여주며, 음악을 감상한 뒤에도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는다.

오늘 소개할 음반은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디 에니드(The Enid)가 1979년 발표한 ‘Six Pieces’다. 함께 살펴볼 재발매 음반의 표지는 영국 수채화가 니콜라 그레고리(Nicola Gregory)의 작품이다.

니콜라 그레고리는 1960년 영국 사우스웨일스의 스완지에서 태어났다. 가워반도의 울창한 시골에서 성장한 그는 계절의 변화와 자연, 아름다운 해변을 가까이하며 미적 상상력을 키웠다.

스완지 미술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런던의 마틴스 미술학교에서 그래픽을 공부했다. 이후 런던 중심부의 스튜디오에서 30년 넘게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수채화 작업을 이어왔다. 뱅크사이드의 왕립수채화협회에서 정기적으로 작품을 선보였으며, 2020년에는 웨일스 왕립수채화협회 회원으로 선출됐다.


그의 작품은 주로 집 주변에서 발견한 다양한 물건을 소재로 삼은 정물화다. 사물에 비친 빛과 반사를 세밀하게 포착하면서도, 색채는 물이 빠진 듯 여리고 흐릿하다. 수채화 특유의 투명한 표현과 낮은 채도가 어우러져 담담하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잔상을 남긴다.

오늘 소개하는 표지는 ‘Six Pieces’의 초판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재발매 과정에서 새롭게 채택된 작품이다. 초판 표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니지만, 음반에 담긴 음악의 성격에는 오히려 이 수채화가 더욱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흐릿한 색채 사이에서 번지는 은은한 아름다움이 디 에니드의 낭만적이고 장중한 음악과 절묘하게 호응한다.
클래식과 록의 경계를 허문 디 에니드
디 에니드는 영국왕립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로버트 존 가드프리(Robert John Godfrey)가 1973년 런던에서 결성한 그룹이다. 클래식계에서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구축했다.

디 에니드는 일반적인 록 음악의 틀을 깨고 클래식 오케스트레이션과 서정적인 선율을 록 음악에 융합한 대표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으로 평가받는다. BBC의 유명 DJ 앨런 프리먼은 이들을 록을 기반으로 한 음악을 교향악적 클래식의 힘과 규모로 가장 성공적으로 융합한 그룹이라고 극찬했다.
이들의 음악은 보컬보다 연주에 중심을 둔다. 신시사이저와 키보드, 기타 등 여러 악기를 복합적으로 활용해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울림을 재현한다. 거칠고 단순하며 자극적인 록 사운드와 달리 지극히 낭만적이고 지적이며 장엄한 클래시컬 사운드를 고집했다.
음반을 발매하던 레코드사의 파산 등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음악적 독립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1983년에는 팬클럽을 기반으로 한 후원 조직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음반을 발매했다. 오늘날 크라우드 펀딩과 유사한 음악 후원 모델을 일찍부터 실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디 에니드의 음악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였다. 당시 월간팝송 편집장 전영혁이 진행하던 음악 마니아 대상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의 연주곡을 접했다. 특히 ‘Sheets Of Blue’를 인상 깊게 들은 뒤 해외에서 디 에니드의 음반을 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첫 음반을 손에 넣었던 날에는 설렘과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주요 음반 대부분을 수집했고, 디 에니드는 지금까지도 각별한 애정을 갖고 듣는 그룹으로 남아 있다.
클래시컬 아트 록의 전성기를 기록한 초기 작품들
디 에니드가 초기에 발표한 다섯 장의 음반은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에서 클래시컬 아트 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1976년 발표한 데뷔 음반 ‘In the Region of the Summer Stars’는 타로 카드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리더 로버트 존 가드프리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화려한 구성이 돋보인다.
1977년의 ‘Aerie Faerie Nonsense’는 디 에니드의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한 명반이다. 드뷔시와 라흐마니노프 등 클래식 거장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으며, 클래식과 록이 하나의 장대한 서사로 결합한다.
1979년에는 오늘 소개하는 ‘Six Pieces’와 함께 ‘Touch Me’가 발표됐다. ‘Touch Me’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함께 확보하며 평단의 호평을 받은 초기 전성기의 대표작이다.
1983년의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는 레코드사 파산 이후 팬클럽 후원 방식을 통해 독자적으로 제작한 음반이다. 디 에니드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보컬을 도입하는 등 이전과 다른 극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2000년대 들어 로버트 존 가드프리는 알츠하이머와 당뇨 등 건강상의 문제로 현역 무대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음악적 조언자로 남아 디 에니드가 지켜온 음악 철학과 예술적 명맥을 이어가는 데 힘을 보탰다.
‘Six Pieces’, 한 편의 환상적인 음악극
‘Six Pieces’는 디 에니드의 초기 전성기에 발표된 작품으로, 클래시컬한 장중함과 낭만적인 서정성이 빛나는 음반이다.
첫 곡 ‘The Punch and Judy Man’은 클래식 음악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구성으로 청자를 디 에니드의 세계로 이끈다. 뒤이어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영국 민요 ‘Scarborough Fair’를 독창적으로 편곡한 ‘Once She Was (Scarborough Fair)’가 흐른다. 익숙한 선율이 디 에니드 특유의 우아하고 환상적인 연주를 만나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The Ringmaster’에서는 서커스단의 곡예사가 무대 위를 누비는 듯한 역동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Sanctus’는 종교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숭고함과 비장미를 품고 있으며, ‘The Dreamer’는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뒤의 쓸쓸함처럼 아련하고 구슬픈 정서를 전한다.
각각의 곡은 저마다 다른 장면과 감정을 그려내지만, 음반 전체를 들으면 한 편의 환상적인 음악극을 감상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디 에니드의 정교한 구성과 웅장한 연주,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니콜라 그레고리의 수채화와 디 에니드의 음악은 서로 다른 예술 장르에 속해 있지만, 이번 재발매 음반에서는 하나의 정서로 이어진다. 물기를 머금은 듯 번지는 색채와 희미한 빛,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장중하고 낭만적인 선율은 눈과 귀를 동시에 사로잡는다.
록의 외형 안에 클래식의 깊이와 규모를 담아낸 디 에니드의 ‘Six Pieces’. 빠르고 자극적인 음악에서 잠시 벗어나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보듯 음악을 듣고 싶은 이들에게 일청을 권한다.
글 ㅣ 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음반 개요
음반명: Six Pieces
아티스트: The Enid
발표 연도: 1979년
장르: 프로그레시브 록·클래시컬 아트 록
핵심 인물: Robert John Godfrey
재발매 앨범 표지 작품: Nicola Gregory
추천곡: The Punch and Judy Man, Once She Was (Scarborough Fair), The Ringmaster, Sanctus, The Dreamer
감상 링크
The Enid - Once She Was (Scarborough Fair)
The Enid - San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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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택 기자 dream-kaz@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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