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정지용이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먼저 시 「향수」의 서정적 풍경과 함께 떠오른다. 고향의 들판과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와 질화로가 만들어내는 그 그리운 풍경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아 왔다.
그러나 정지용을 단지 ‘향수의 시인’으로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문학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한국 현대시가 새로운 언어와 감각을 찾아 나아가던 시기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의 가능성을 실험한 시인이었고, 당대 문단의 흐름을 이끌면서 후배 시인들의 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문학인이었다.

박태상의 『정지용의 삶과 문학』은 바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지용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박태상 저자가 쓰고 깊은샘에서 2010년 출간한 이 책은 358쪽 분량의 정지용 연구서다. 저자가 지용문학포럼에서 발표한 연구 논문과 새롭게 집필한 글을 한데 모아 정지용의 내면세계, 문학적 지향, 『문장』과의 관계, 한국문화사 속 위상, 북한문학사에서의 평가까지 폭넓게 살핀다.
정지용은 왜 ‘불안’했는가
이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정지용을 연대기적으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제1부의 제목부터 ‘정지용은 왜 불안했는가’이다.
책은 ‘정지용과 청록파 시인들’, ‘『문장』에 발표한 정지용 한적시의 특성’ 등을 통해 정지용의 내면으로 접근한다. 시의 외형적인 아름다움 뒤에 자리한 결핍과 불안,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 시대적 현실 속에서 시인이 선택했던 정신적 자세를 추적한다.
정지용이 활동했던 시기는 개인에게도 민족에게도 결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다. 식민지 현실이 점점 더 혹독해지던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 문학인은 정치와 현실, 예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고민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지용은 직접적인 정치적 구호보다는 언어와 이미지, 자연과 정신세계 속에서 자신의 시적 질서를 구축해 나갔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정지용의 자연시나 종교시, 산수시를 단순한 현실도피라고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인 해석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의 고요함 속에는 시대의 소음이 있었고, 자연에 대한 응시 뒤에는 불안한 현실로부터 정신의 균형을 지키려는 치열한 긴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향수’에서 새로운 시의 언어까지
정지용 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새로움’이다.
그는 기존의 시적 언어에 안주하지 않았다. 사물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포착하려 했고, 감정을 직접 토로하기보다 이미지와 감각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정지용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대신 사물과 풍경을 정확한 위치에 놓아 독자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도록 만든다.
이런 특징은 한국 현대시의 언어를 한 단계 끌어올린 중요한 성취로 평가된다.
『정지용의 삶과 문학』의 제3부는 이를 ‘정지용은 왜 항상 새로운 것에 집착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룬다. 저자는 잡지 『문장』과 정지용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의 실험정신을 살펴본다. 책의 출판사 소개 역시 정지용을 전통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간 실험적인 예술가이자 시인으로 평가한다.
‘집착’이라는 다소 강한 표현은 오히려 정지용의 문학적 본질을 잘 드러낸다.
예술가에게 새로운 것은 유행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 어제 사용했던 언어를 오늘 그대로 반복한다면 시는 생명력을 잃는다. 정지용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시인이었을 것이다.
정지용과 청록파, 그리고 한 시대의 문학적 계보
이 책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정지용을 독립된 한 명의 시인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지용과 청록파 시인들의 관계를 통해 한국 현대시가 어떻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본다.
정지용은 『문장』을 중심으로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후배 문인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문학적 가능성을 알아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존재는 자신의 작품을 남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한국 현대시의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데까지 확장됐다.
따라서 정지용을 읽는다는 것은 한 시인의 작품만 읽는 일이 아니다.
정지용을 중심으로 당시 문단과 잡지, 시인과 미술가, 청록파를 비롯한 후배 문인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 근대문화가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제2부에서 다루는 ‘정지용과 문장파 근대미술가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학을 문학 내부에만 가두지 않고 미술과 출판, 잡지문화 등으로 확장해 정지용의 위치를 살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반적인 시인론보다 폭이 넓다.
한 시인의 운명이 남과 북에서 어떻게 달라졌는가
『정지용의 삶과 문학』에서 독특한 부분은 제4부 ‘북한에서 정지용은 부활했는가’이다.
정지용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작품 자체만큼이나 해방 이후의 운명이 복잡했던 시인이다. 그의 문학을 둘러싼 평가 역시 남북 분단과 이념대립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저자는 ‘북한문학사에서의 정지용’을 통해 북한에서는 정지용을 어떻게 평가해왔으며 문학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부여했는지를 살펴본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문학작품의 운명이 반드시 작품의 예술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어떤 작가는 한 시대에 추앙받다가 다른 시대에 잊히기도 하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읽히지 못하다가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문학사의 중심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정지용의 삶은 바로 20세기 한국사가 한 문인의 이름과 작품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문학 연구와 지역문화가 만나는 책
저자 박태상과 정지용의 인연도 이 책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책의 출간 당시 소개에 따르면 박태상은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와 대학원에서 공부해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방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또한 정지용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열리는 ‘지용제’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지용문학포럼을 통해 새로운 정지용 관련 자료를 꾸준히 발굴·소개해왔다.
그래서 『정지용의 삶과 문학』은 단순히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학술서와는 조금 다른 온도를 지닌다.
한 시인의 고향에서 매년 사람들이 모이고, 그의 시를 낭송하고, 연구자들이 새로운 자료를 발표하며, 지역 전체가 한 시인을 기억하는 문화적 과정과 함께 만들어진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출판사 역시 옥천 지용제가 문학제를 넘어 문화를 지역의 정체성과 연결한 사례라는 점, 그리고 초기부터 지속된 지용문학포럼이 새로운 연구 성과를 축적하는 기반이 됐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학이 책장 속에만 존재하지 않고 한 도시의 기억이 되고, 축제가 되고, 다시 새로운 연구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우리가 다시 정지용을 읽어야 하는 이유
오늘날 정지용의 시를 다시 읽는 일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문장과 이미지를 소비한다. 빠른 정보와 짧은 영상에 익숙해질수록 하나의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정확한 한 단어를 선택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정지용의 시는 그 반대편에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물 하나를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한 문장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향수』가 발표된 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 시의 고향 풍경 속에서 자신의 유년과 고향을 발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읽은 뒤 다시 「향수」를 읽으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저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한국어의 감각을 개척하려 했던 한 시인의 실험이 보이고,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한 지식인의 불안이 보이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세대를 준비했던 문학인의 모습까지 겹쳐진다.
좋은 문학 연구서는 작품을 어렵게 만드는 책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작품을 새롭게 읽게 만드는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태상의 『정지용의 삶과 문학』은 정지용 연구자를 위한 전문서인 동시에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향수의 시인’이라는 익숙한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한 사람의 치열한 예술가, 실험가, 문학인으로서 정지용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
한 시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결국 그가 살았던 시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통과해 살아남은 한 편의 시가 왜 오늘까지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읽히는지도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서 개요
도서명 : 『정지용의 삶과 문학』
저자 : 박태상
출판사 : 깊은샘
발행일 : 2010년 5월 30일
분야 : 문학의 이해·한국문학론·한국작가론
쪽수 : 358쪽
ISBN : 978-89-7416-222-1
주요 구성
제1부 정지용은 왜 불안했는가
정지용과 청록파 시인들 / 『문장』에 발표한 정지용 ‘한적시’의 특성
제2부 정지용은 무엇을 지향했는가
정지용과 ‘문장파 근대미술가들’ / 한국문화사의 관점에서 본 정지용
제3부 정지용은 왜 항상 ‘새로운 것’에 집착했는가
『문장』과 정지용
제4부 북한에서 정지용은 부활했는가
북한문학사에서의 정지용
임만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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