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품은 때때로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음반의 정서를 말해준다. 앨범 재킷에 등장하는 색과 선, 형태는 음악이 가진 감정의 방향을 암시하고, 음악을 들은 뒤 다시 바라본 표지는 처음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번 ‘이 한장의 음반’의 주인공은 미국 신시내티 출신 얼터너티브 록 밴드 더 내셔널(The National)의 2010년 앨범 《High Violet》이다. 그리고 이 음반의 시각적 인상을 결정하는 작품은 미국 작가 마크 폭스(Mark Fox)의 2001년 작품 《The Binding》이다.

마크 폭스는 설치미술과 조각, 복합소재 회화를 넘나드는 작가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미술학 석사(MFA),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에서 미술학 학사(BFA)를 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 경험한 토네이도다. 강렬한 자연재해의 기억은 불안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았고, 자신이 가진 물건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설치 작업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폭스가 토네이도를 단순한 파괴의 상징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힘 속에서 그는 다시 만들어지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발견했다. 파괴와 생성, 혼란과 질서라는 서로 반대되는 힘이 그의 작업 안에서 공존한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 수많은 선과 이미지, 문자와 형태가 화면과 공간을 가득 채운다. 각각의 요소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연결된다. 종이와 잉크, 수채화, 크레용으로 제작한 수많은 단어의 조각들이 서로 얽히며 거미줄과도 같은 구조를 만들어내는 작업 역시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회화의 평면에 머물지 않는다. 잘라내고, 쌓고, 연결하고, 공간에 펼쳐놓는 과정에서 드로잉은 조각이 되고 조각은 다시 설치 공간으로 확대된다. 라이스 갤러리 설치 작품에서도 수많은 사물의 이미지와 선들이 공간 전체를 점유하며 관람객을 거대한 기억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듯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더 내셔널의 《High Violet》에 사용된 《The Binding》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노랑과 빨강, 보라, 초록 등 다양한 색의 선이 영어 필기체를 빠르게 휘갈겨 쓴 것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수많은 글자와 선은 서로 엉키고 겹치지만 완전히 무질서하지는 않다.

오히려 일정한 흐름과 리듬을 만들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한다. 복잡하지만 아름답고, 혼란스럽지만 이상할 만큼 안정적이다. 이 작품을 원색 철사를 이용한 필기체 형태의 조각으로 설명하며, 선들이 춤추듯 곡선을 이룬다.
바로 이 지점에서 《High Violet》의 음악과 마크 폭스의 작품은 절묘하게 만난다.
더 내셔널의 음악은 격렬하게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진동한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지만 끝까지 모두 말하지 않는 듯한 감정,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한 걸음 물러서는 관계의 긴장, 불안하면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내면의 힘이 음악 곳곳에 흐른다.
마크 폭스의 《The Binding》 역시 비슷하다. 선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충돌하며 겹친다. 어느 하나의 문장을 또렷하게 읽기보다는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떠오르는 장면에 가깝다. 그 복잡함은 더 내셔널의 음악 속에서 반복되는 불안과 긴장, 기억의 파편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더 내셔널은 데스너 형제와 데벤도프 형제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미국 록 밴드다. 2001년 데뷔앨범을 발표한 이후 오랜 기간 활동을 이어왔으며, 《High Violet》은 이들의 다섯 번째 정규앨범으로 2010년 발표됐다. 앨범은 미국 앨범 차트 3위에 오르는 성과를 기록했고 여러 국가에서 골드 인증을 받으며 밴드의 존재감을 크게 확장시켰다.
당시 세계 록 음악의 흐름에서 영국 밴드들의 존재감이 강했던 상황에서도 더 내셔널은 미국 얼터너티브 록이 가진 또 다른 깊이를 보여줬다. 화려한 기타 솔로나 과도한 장식보다 절제된 연주, 반복되는 리듬,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사운드가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이는 목소리가 있다.
더 내셔널의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강하게 남는 것은 낮고 깊은 보컬이다. 음악은 때로 무심한 듯 흘러가지만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압력이 숨어 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찾아오는 고독, 관계 속에서 느끼는 불안,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축적되는 피로와 기억이 음악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High Violet》의 대표곡 ‘Bloodbuzz Ohio’는 이러한 밴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반복되는 리듬 위에서 음악은 점차 힘을 얻고, 깊게 가라앉은 보컬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 감정을 끌고 간다. 또 다른 수록곡 ‘Afraid of Everyone’에는 제목 그대로 현대인이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배어 있다.
그래서 《High Violet》의 표지에 《The Binding》이 선택된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음반에 사용한 것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수많은 색의 선이 뒤엉켜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마크 폭스의 작품처럼 더 내셔널의 음악에도 수많은 감정이 겹쳐 있다. 사랑과 불안, 익숙함과 두려움, 기억과 상실, 고독과 관계가 서로 얽힌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삶의 감정은 언제나 가지런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 충돌하고 중첩되며 때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마크 폭스의 선들은 그 혼란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더 내셔널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불안을 제거하는 대신 불안과 함께 머물고, 고독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 고독의 깊이를 천천히 들여다본다. 그렇게 바라보면 《High Violet》은 한 장의 음반이면서 동시에 한 점의 거대한 복합 작품처럼 느껴진다.
마크 폭스의 선을 눈으로 따라가며 더 내셔널의 음악을 듣는다. 수많은 선들이 서로 얽히고 다시 풀리는 순간, 눈으로 보는 미술과 귀로 듣는 음악 사이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선이 이어진다.
그것이 우리가 ‘이 한장의 음반’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인지도 모른다.
앨범 개요
아티스트: The National
앨범명: High Violet
발표: 2010년
장르: 얼터너티브 록
앨범 성격: 더 내셔널의 다섯 번째 정규앨범
앨범 커버 작품: Mark Fox, 《The Binding》, 2001
추천곡: ‘Bloodbuzz Ohio’, ‘Afraid of Everyone’
앨범 커버 특징: 다양한 색의 필기체 형태가 복잡하게 중첩된 마크 폭스의 작품을 활용
감상 포인트: 불안과 고독, 기억과 관계의 긴장을 절제된 사운드와 깊은 보컬로 표현한 앨범
글 ㅣ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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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우 칼럼니스트 jaewoo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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