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음반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음악보다 먼저 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있다. 

 

영국 프로그레시브록을 대표하는 그룹 제네시스(Genesis)가 1973년 발표한 앨범 《Selling England By The Pound》가 바로 그런 음반이다.

그룹 제네시스(Genesis) 1973년 앨범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빛이 바랜 듯한 크림색 바탕 안에 영국의 정원을 연상시키는 풍경이 펼쳐진다. 가지런하게 다듬어진 나무들 사이로 사람들이 서 있고, 화면 앞쪽 벤치에는 한 남자가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옆에는 정원의 일상적인 풍경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잔디 깎는 기계가 놓여 있다.

 

한없이 평온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기묘하다. 현실의 풍경 같지만 자세히 바라볼수록 꿈속 장면처럼 낯설어진다. 이 그림이 바로 영국 화가 베티 스완윅(Betty Swanwick, 1915~1989)의 작품 〈The Dream〉이다.

미술교사에서 화가와 소설가로

 

베티 스완윅의 본명은 에이다 엘리자베스 에디스 스완윅(Ada Elizabeth Edith Swanwick)이다. 1915년 런던 포레스트 힐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그림과 가까이 지냈다.

 

해군 예비군에 몸담았던 아버지 헨리 제라드 스완윅은 해양 수채화를 그렸고, 어머니 에델 프리실라는 어린 딸의 손에 연필을 쥐여주며 미술적 재능을 키워주었다. 부모의 지원 속에서 스완윅은 15세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들어갔으며, 이후 골드스미스 칼리지와 왕립미술대학, 중앙예술공예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에드워드 보든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녀의 공식적인 예술 경력은 1936년 런던 교통국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1954년까지 공공기관을 위한 포스터 작업을 이어갔다. 스완윅에게 그림과 글은 서로 분리된 세계가 아니었다. 자신의 미술적 구상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1945년 첫 소설 《십자가의 목적》을 출판했다. 이 작품에는 그녀가 직접 그린 연필 삽화도 실렸다.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었던 스완윅의 활동 영역은 넓었다. 1951년 영국 페스티벌에서는 벤 니콜슨과 함께 레가타와 로켓 레스토랑의 벽화 작업에 참여했고, 1960년에는 에벨리나 어린이병원을 위한 벽화를 제작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그림에는 단순한 회화적 이미지 이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그 앞과 뒤에 존재할 것 같은 서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Selling England By The Pound》의 표지 역시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읽는 듯하다.

〈The Dream〉 속에 들어온 잔디 깎는 기계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음반 표지에서 보는 〈The Dream〉이 스완윅이 처음 완성했던 그림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원래 작품에는 화면 왼쪽 아래의 잔디 깎는 기계가 없었다. 제네시스는 스완윅에게 이 기계를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앨범에 수록된 곡 〈I Know What I Like〉를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 작은 변화가 음반 커버를 단순한 명화의 차용에서 음악과 회화가 긴밀하게 대화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잘 다듬어진 정원과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벤치 위에서 깊이 잠든 남자와 잔디 깎는 기계. 모두 너무나 영국적이고 일상적인 소재처럼 보이지만, 한 화면 안에 모이면 묘한 부조화가 만들어진다. 그 부조화는 제네시스의 음악과도 닮아 있다. 익숙한 영국의 전통과 풍경을 소재로 삼으면서 그 안에 풍자와 환상, 연극적 상상력과 복잡한 음악 구조를 집어넣는 방식이다.

피터 가브리엘 시대의 제네시스

 

제네시스는 1966년 결성돼 1969년 첫 앨범을 발표한 영국 그룹이다. 

그룹 제네시스(Genesis)

초기와 중기에는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이 리드 보컬을 맡았다. 당시 제네시스의 무대는 단순한 록 공연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피터 가브리엘은 독특한 의상과 기괴하면서도 상징적인 분장을 하고 무대에 등장했다. 노래와 연주 사이에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때로는 등장인물 자체가 되어 공연을 하나의 극처럼 끌고 갔다. 자료 속 제네시스의 공연 사진에서도 마이크 앞에 선 피터 가브리엘과 기타, 드럼, 건반이 어우러진 밴드의 무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음악이 있었다.

 

복잡한 곡 구성과 긴 연주, 클래식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전개, 포크적인 서정성과 록의 강렬함이 결합됐다. 그리고 그 위에 피터 가브리엘 특유의 목소리와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더해졌다.《Selling England By The Pound》는 바로 그런 제네시스의 초기 정체성이 가장 선명하게 살아 있던 시기의 음반이다.

영국을 ‘파운드 단위로 판다’

 

앨범 제목 ‘Selling England By The Pound’부터 범상치 않다.

 

직역하면 ‘영국을 파운드 단위로 팔다’ 정도가 된다. 화폐 단위인 파운드와 무게 단위인 파운드가 겹쳐지는 제목 속에는 당시 영국 사회와 상업화에 대한 제네시스 특유의 시선이 녹아 있다.

 

그리고 그 제목 아래 베티 스완윅의 목가적인 그림이 놓인다.

 

잘 정돈된 정원은 마치 오래된 영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세계는 결코 평온하지만은 않다. 인물들은 서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각자 다른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하고, 화면 앞 벤치에서 잠든 남자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 머문다. 그 옆의 잔디 깎는 기계는 평범한 일상의 사물이면서 동시에 제네시스의 노래와 연결되는 암호가 된다.

 

이처럼 《Selling England By The Pound》는 제목과 음악, 그림을 따로 떼어놓고 보기 어려운 음반이다.

첫 곡부터 펼쳐지는 제네시스의 세계

 

이 음반의 문을 여는 곡은 〈Dancing With The Moonlit Knight〉다. 곡의 시작은 의외로 조용하다. 피터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거의 독백처럼 등장하면서 청자를 이야기 속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음악은 곧 기타와 베이스, 드럼, 키보드가 복잡하게 얽히는 거대한 구조로 확장된다.

 

잔잔한 서정에서 강렬한 록으로, 다시 섬세한 분위기로 이동하는 변화는 프로그레시브록이 왜 ‘진행하는 음악’이라 불리는지를 잘 보여준다.

 

앨범 커버의 정원 역시 비슷하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기묘한 이야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제네시스의 음악 역시 첫 순간에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다가오다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복잡한 구조와 풍자, 이야기와 상징을 발견하게 한다.

피터 가브리엘 이후의 제네시스

 

제네시스의 역사는 이후 큰 변화를 맞는다.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와 독특한 의상으로 밴드의 전면에 섰던 피터 가브리엘이 탈퇴한 뒤에는 드러머였던 필 콜린스(Phil Collins)가 리드 보컬까지 맡게 된다. 이후 제네시스의 음악은 점차 팝과 록의 성격이 강해졌다. 특히 1980년 앨범 《Duke》 이후에는 이전보다 훨씬 대중적인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초기의 프로그레시브록을 좋아했던 팬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반대로 제네시스는 훨씬 넓은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고 음반 판매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제네시스를 떠난 피터 가브리엘은 싱어송라이터로 독립해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펼쳤으며, 필 콜린스 역시 제네시스 활동과 솔로 활동을 병행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했다.

 

그러나 프로그레시브록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제네시스는 여전히 피터 가브리엘 시대의 제네시스다. 그리고 그 중심에 《Selling England By The Pound》가 있다.

 
눈으로 먼저 듣는 음반

 

LP 시대의 앨범 커버는 음악의 포장지가 아니었다.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리기 전에 먼저 마주하는 하나의 작품이었고,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 청자의 상상력을 열어주는 첫 번째 트랙과도 같았다.

 

《Selling England By The Pound》는 그런 의미에서 ‘눈으로 먼저 듣는 음반’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베티 스완윅의 〈The Dream〉을 바라보다가 음반을 재생하면 그림 속 잠든 남자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정원의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저 남자는 한낮의 공원 벤치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지, 그리고 화면 한쪽에 놓인 잔디 깎는 기계는 왜 그토록 의미심장해 보이는지 상상하게 된다.

 

그 순간 그림은 음악의 일부가 된다.

 

음악 역시 그림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확장한다.

 

1973년 발표된 《Selling England By The Pound》는 제네시스가 대중적인 팝·록 그룹으로 변화하기 이전, 프로그레시브록의 본질을 선명하게 간직했던 시기의 대표작으로 오늘날까지 애호가들에게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 음반이 여전히 매력적인 것은 복잡한 연주나 오래된 록의 향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베티 스완윅이 그린 꿈결 같은 영국의 정원, 그 안으로 슬쩍 들어온 잔디 깎는 기계, 피터 가브리엘의 연극적인 목소리와 제네시스의 치밀한 연주가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장의 그림을 바라보고 한 장의 음반을 듣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1973년의 영국과 스완윅의 꿈, 제네시스가 만들어낸 음악적 상상력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된다.

 

그림을 듣고 음악을 바라보게 만드는 음반.

 

 

제네시스의 《Selling England By The Pound》가 반세기가 지나도록 특별한 이유다.


앨범 개요

앨범 | Genesis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발표 | 1973년
장르 | Progressive Rock
앨범 커버 | Betty Swanwick, 〈The Dream〉
감상곡 | 〈Dancing With The Moonlit Knight〉, 〈I Know What I Like〉

글 | 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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