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을 듣는 즐거움은 귀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장의 앨범 커버가 먼저 시선을 붙잡고, 그 그림의 분위기가 음악의 첫 음보다 앞서 청자의 감각을 열어주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즈 퓨전 그룹 스텝스 어헤드(Steps Ahead)의 1983년 앨범은 ‘눈으로 즐기며 듣는 음반’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음반 개요

  • 아티스트: Steps Ahead

  • 앨범: Steps Ahead

  • 발표: 1983년

  • 중심 연주자: Mike Mainieri

  • 주요 참여 연주자: Michael Brecker, Peter Erskine, Eddie Gomez, Eliane Elias

  • 음악 성향: 하드밥을 바탕으로 한 퀸텟 연주, 이후 퓨전 재즈로 확장

  • 커버 모티브: Andrew Stevovich, Fallen Diva (1981~1982)

  • 추천 감상곡: ‘Pools’ 

 

이 앨범의 커버는 미국 현대미술 원로화가 앤드류 스테보비치(Andrew Stevovich)의 작품 ‘Fallen Diva’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 음반을 “진한 커피향 같은 연주를 들려주는 그룹 스텝스 어헤드의 1983년 앨범”이다.

 

쓰러진 디바, 음악보다 먼저 이야기를 건네는 그림

 

앤드류 스테보비치는 1948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195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970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을 졸업한 뒤 매사추세츠 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71년 보스턴 알파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아델슨 갤러리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1999년 댄포스 박물관 전시와 2008~2009년 허드슨리버 박물관 회고전 등을 통해 오랜 작품세계를 정리했다. 그의 작품은 추상적인 형식과 구상적인 서사를 결합한 유화와 파스텔화로 알려져 있으며, 보스턴 미술관과 댄포스 미술관, 뉴브리튼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앤드류 스테보비치(Andrew Stevovich) 작품 “Fallen Diva” (1981~1982)

이번 앨범과 연결되는 작품은 1981년에서 1982년 사이 완성된 ‘Fallen Diva’다. 제목 그대로 한 명의 디바가 쓰러져 있고, 주변의 남성 단원들이 그녀를 부축하거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담겼다. 공연이나 리허설 중 과로로 쓰러진 여성을 동료들이 돌보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구성이다. 인물들의 동작은 절제되어 있지만 표정과 시선은 묘한 긴장을 만든다. 단순하면서도 안정적인 인물 배치, 간결한 색채, 그리고 인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짧은 한 장면 안에 하나의 서사가 완성된다.

 

원화 이미지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선명하다. 화면의 중심을 가로질러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비스듬히 누워 있고, 검은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 

 

붉은 계열의 배경과 의상, 검은 정장의 대비는 화면을 매우 간결하게 만들면서도 극적인 긴장을 강화한다. 쓰러진 여성의 창백한 얼굴과 주변 인물들의 무표정에 가까운 시선은 감정을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1983년 발표된 스텝스 어헤드의 앨범 커버는 이 ‘Fallen Diva’의 구도와 모티브를 가져와 재구성한 것이다. 원화를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아트디렉터가 그 모티브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앨범 커버를 제작했다. 

 

앨범 커버와 원화를 나란히 놓고 보면 차이는 더욱 흥미롭다. 원화가 인물들의 얼굴과 손, 드레스의 색채를 비교적 정교하게 묘사하며 서사적 긴장을 강조한다면, 앨범 커버는 이를 한층 더 평면적이고 그래픽적인 이미지로 정리했다. 화면 상단에는 큼지막한 ‘STEPS AHEAD’라는 타이포그래피가 자리하고, 그 아래에 Michael Brecker, Peter Erskine, Eddie Gomez, Mike Mainieri, Eliane Elias의 이름이 나열돼 있다. 그림과 재즈 뮤지션들의 이름이 하나의 디자인 안에서 만나면서, 미술 작품이 곧 음악의 시각적 서문이 된다.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인 스텝스 어헤드

 

스텝스 어헤드는 비브라폰 연주자 마이크 마이네이리(Mike Mainieri)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즈 퓨전 그룹이다. 이들은 “당시 최고의 연주실력자들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색소폰에는 마이클 브렉커(Michael Brecker), 베이스에는 빌 에반스 트리오에서 연주했던 에디 고메즈(Eddie Gomez), 피아노에는 브라질 출신의 엘리안 엘리아스(Eliane Elias), 그리고 드럼에는 웨더 리포트 출신 피터 어스킨(Peter Erskine)이 참여했다. 중심에는 마이크 마이네이리의 비브라폰이 있었다. 한 사람의 스타를 앞세우기보다 각기 뚜렷한 개성을 가진 정상급 연주자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구성한 셈이다.

 

이 앨범의 매력은 무엇보다 연주자 각각의 기량이 튀어나오기보다 화합 속에서 살아난다는 데 있다. 서로 주고받는 인터플레이는 유연하고, 솔로 파트에서도 다른 연주자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절제가 느껴진다. 동시에 멜로디 라인이 분명해 난해함보다는 친근함이 앞선다.  “연주자들 간의 인터플레이는 물론 솔로파트에서의 배려가 담긴 절제된 연주력, 멜로디 라인이 잘 살아있는 작곡으로 모든 곡들이 쉽게 귀에 남는다”고 평가된다.

 

스텝스 어헤드가 이후 보다 강한 일렉트릭 사운드와 퓨전 재즈로 나아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1983년 앨범은 그룹의 변화 과정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 첫 앨범이 하드밥에 기반한 퀸텟 연주를 들려주며, 두 번째 앨범 이후 일렉트릭 성향이 더욱 강조된 퓨전 재즈로 변모했다. 이후 저니(Journey) 출신 드러머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를 비롯해 멤버 교체를 거듭하면서 2010년대 중반까지 연주 활동을 이어갔다.

 

앨범 뒷면에 담긴 음악의 지도

그룹 스텝스 어헤드(Steps Ahead) 1983년 앨범 뒷면

앨범 뒷면 사진은 이 음반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멤버들의 단체사진 옆으로 수록곡이 정리되어 있는데, ‘Pools’, ‘Islands’, ‘Loxodrome’, ‘Both Sides of the Coin’, ‘Skyward Bound’, ‘Northern Cross’, ‘Trio (An Improvisation)’ 등의 곡명이 확인된다.

그룹 스텝스 어헤드(Steps Ahead) 1983년 앨범 앞면

앨범 앞면이 ‘Fallen Diva’라는 극적인 장면을 통해 음악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면, 뒷면은 다섯 연주자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 엄숙한 예술사진보다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분위기에 가깝다. 앞면의 비현실적이고 정적인 회화와, 뒷면의 살아 있는 뮤지션 사진이 대비되면서 이 한 장의 LP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작품처럼 완성된다.

 

그 가운데 필자가 별도로 감상을 권하고 있는 곡은 ‘Pools’다. 비브라폰 특유의 맑고 투명한 울림, 색소폰의 유려한 선율, 피아노와 베이스가 만드는 탄탄한 공간, 그리고 피터 어스킨의 세련된 리듬이 어우러지면서 스텝스 어헤드가 지닌 음악적 색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곡으로 음반 전체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된다.

 

그림의 절제와 음악의 절제

 

이 앨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결국 그림과 음악이 닮아 있다는 것이다.

 

앤드류 스테보비치의 ‘Fallen Diva’는 극적인 사건을 다루면서도 과도한 몸짓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물의 배치와 시선, 몇 가지 색채만으로 장면의 긴장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스텝스 어헤드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정상급 연주자들이 모였음에도 자신의 기교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서로에게 공간을 양보하면서 필요한 순간에만 솔로가 앞으로 나온다.

 

그래서 이 음반은 화려하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세련됐지만 차갑지 않다. 복잡한 화성과 리듬 안에서도 멜로디를 잃지 않으며, 연주자의 기량을 충분히 느끼게 하면서도 음악 전체의 흐름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Fallen Diva’의 절제된 인물들이 화면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완성하듯, 다섯 연주자 역시 서로의 음을 받쳐주며 하나의 음악적 장면을 만들어낸다.

 

진한 커피 한 잔처럼 남는 한 장

 

좋은 음반은 한 번의 감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 들었을 때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고, 앨범 커버를 다시 바라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보인다.

 

Steps Ahead - Pools

 

스텝스 어헤드의 1983년 앨범은 바로 그런 음반이다. 앤드류 스테보비치의 ‘Fallen Diva’에서 시작된 시각적 긴장은 마이클 브렉커와 마이크 마이네이리, 에디 고메즈, 엘리안 엘리아스, 피터 어스킨의 연주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림의 인물들이 서로의 몸을 받쳐주듯, 다섯 연주자 역시 서로의 소리를 받쳐준다.

 

이 앨범은 “여름날 밤 진한 커피향과 같은 재즈”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빠르게 소비되는 음악이 넘쳐나는 시대에, 한 장의 커버를 찬찬히 바라보고 LP를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첫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천천히 따라가 보고 싶은 음반이다.

 

무더운 여름밤, 조명을 조금 낮추고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스텝스 어헤드의 음악을 들어보자. ‘Fallen Diva’의 정지된 장면이 어느 순간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림 속에 머물던 이야기가 재즈의 리듬과 멜로디를 타고 방 안으로 천천히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글 |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최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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