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최재우

미술은 눈으로 감상하고 음악은 귀로 듣는다. 두 예술은 서로 다른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작품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결국 같은 지점을 향한다. 작가가 바라본 세계와 시대의 감정, 그리고 말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을 색과 선, 리듬과 음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이라 멜포드 스프래쉬 2025년 앨범 

마이라 멜포드(Myra Melford)가 2025년에 발표한 앨범 《Splash》는 미술과 음악이 어떻게 서로의 감각을 비추며 하나의 예술적 세계를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음반이다. 

앨범 표지에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2세대를 대표하는 화가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의 작품이 사용됐다. 희미한 청색 화면 위로 검은 선과 붉고 노란 색채가 흘러내리는 모습은 정돈된 풍경이나 구체적인 대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품 앞에 서면 마치 무언가가 폭발하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듯한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사이 트웜블리의 본명은 에드윈 파커 트웜블리 주니어(Edwin Parker Twombly Jr.)다. 1928년 미국 버지니아주 렉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회화와 낙서, 드로잉, 캘리그래피를 결합한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그의 화면에는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보이는 선, 알아보기 어려운 문자, 끊어지고 겹쳐지는 흔적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 선들은 무질서하게 남겨진 것이 아니다. 고대의 신화와 역사, 문학과 개인의 기억이 화면 위에서 충돌하고 해체된 결과다.

특히 2001년 연작 《Lepanto, Part III》는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옅은 청색을 배경으로 검은 선들이 배와 돛, 전투의 잔상처럼 떠다니고, 붉은색과 황색 물감은 불꽃이나 피, 혹은 시간의 얼룩처럼 흘러내린다. 구체적인 형태를 설명하기보다 사건이 남긴 감각과 기억을 화면에 붙잡아 둔 작품이다.

트웜블리의 작품은 멀리서 한눈에 이해하기 어렵다. 가까이 다가가 선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화면 안에서 반복되는 흔적과 여백의 관계를 오래 살펴야 한다. 처음에는 무질서한 낙서처럼 보이던 선이 어느 순간 움직임과 긴장, 침묵과 외침을 품은 조형언어로 다가온다. 이러한 감상 방식은 마이라 멜포드의 음악을 듣는 경험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오랫동안 재즈를 들어온 필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재즈 피아니스트를 묻는다면 남성 연주자로는 프레드 허쉬(Fred Hersch), 여성 연주자로는 마이라 멜포드를 꼽고 싶다. 

마이라 멜포드(Myra Melford) 여사님 피아노 연주 모습 

1957년생인 마이라 멜포드는 작곡과 즉흥연주, 앙상블 구성 능력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 온 피아니스트다. 그는 피아노를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는 악기로 다루지 않는다. 건반을 두드리고 밀어붙이며 때로는 음을 부수고 해체한다. 침묵과 불협화음,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는 리듬까지도 음악의 중요한 재료로 사용한다.

마이라 멜포드의 음악은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작품도 있지만, 많은 연주가 낯설고 난해하다. 전통적인 재즈의 화성과 리듬을 기대하고 듣는 사람에게는 음들이 서로 충돌하고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듣고 지나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들으면 처음에는 파편처럼 보였던 음들 사이에서 하나의 흐름이 나타난다. 끊어진 듯했던 선율이 서로 연결되고, 불규칙하게 들리던 리듬 속에서 치밀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이 트웜블리의 화면을 바라보는 경험과 같다. 트웜블리의 선이 완성된 형태를 묘사하기보다 움직임의 흔적을 보여준다면, 멜포드의 피아노는 완성된 선율을 전달하기보다 소리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과정을 들려준다. 트웜블리가 화면 위에서 선을 긋고 지우고 겹치면서 시간의 층위를 만들었다면, 멜포드는 음을 연주하고 멈추고 충돌시키면서 청각적인 시간의 층위를 쌓는다.

2025년 발표된 《Splash》는 마이라 멜포드가 새롭게 구성한 트리오의 이름이자 앨범 제목이다. 멜포드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첼리스트 미카엘 포르마네크(Michael Formanek)와 드러머 체스 스미스(Ches Smith)가 참여한다. 세 연주자는 전통적인 역할 구분에 머물지 않는다. 피아노가 항상 선율을 이끌거나 드럼이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지 않는다. 각 악기는 서로의 소리에 반응하며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물러나며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 간다.

‘스플래시’라는 제목은 물이나 물감이 튀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한 지점에서 시작된 힘이 사방으로 퍼지고, 그 흔적이 예상하지 못한 형태를 만드는 장면이다. 이 앨범에서도 음은 일정한 틀 안에 머물지 않는다. 피아노의 짧고 날카로운 타건이 튀어 오르면 베이스와 드럼이 다른 방향으로 반응한다. 어느 순간 음악은 거칠게 확장되다가 갑자기 멈추고, 깊은 여백 속에서 새로운 소리가 다시 태어난다.

사이 트웜블리 2001년 작품 연작(聯作) Lepanto, Part III

앨범 표지에 사이 트웜블리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표지 속 검은 선은 멜포드의 단호한 피아노 타건을, 화면을 타고 흐르는 붉고 노란 색채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리듬과 즉흥연주를 연상시킨다. 넓게 남겨진 청색의 여백은 소리가 멈춘 순간의 침묵과 닮았다. 시각적으로 흩어진 색과 선은 앨범 속에서 음과 리듬으로 다시 태어난다.

추상예술은 종종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고, 무엇을 연주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추상예술의 본질은 정답을 찾는 데 있지 않다. 작품이 만들어 내는 감각과 긴장, 그리고 그 앞에서 떠오르는 각자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트웜블리의 작품에서 반드시 특정한 사물이나 이야기를 찾아야 할 필요가 없듯, 멜포드의 음악에서도 익숙한 멜로디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해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선과 색, 음과 침묵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낯설었던 작품이 어느 순간 감상자의 기억과 감정에 연결된다. 그것이 추상미술과 즉흥음악이 가진 힘이다. 작가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감상자가 작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둔다.

7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마이라 멜포드는 여전히 새로운 피아노 사운드를 탐구하고 있다. 이미 완성된 자신의 연주 방식을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연주자들과 만나고, 익숙한 재즈의 문법을 다시 해체하며, 피아노라는 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그의 연주는 안정된 결론보다 끊임없는 질문에 가깝다.

사이 트웜블리의 화면에 남겨진 선이 완결된 문장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질문이라면, 마이라 멜포드의 피아노 역시 하나의 정답으로 끝나지 않는다. 음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침묵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남긴다. 그 질문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감상자는 자신만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발견한다.

《Splash》를 듣는 동안 우리는 그림을 보고, 사이 트웜블리의 작품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는 음악을 듣는다. 눈과 귀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순간, 미술과 음악은 결국 하나의 예술적 본질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과 감각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다.

지난해에도 변함없이 새로운 피아노 사운드 미학을 향해 치열하게 전진한 마이라 멜포드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올해 또는 내년에 만나게 될 그의 다음 앨범을 기다려 본다. 트웜블리의 선이 화면 밖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멜포드의 음악적 탐구도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 소개

생전의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

오늘 소개할 앨범 커버 작품은 본명이 에드윈 파커 트웜블리 쥬니어(Edwin Parker Twombly Jr.)로 후에 작가명(예명)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라는 별칭으로 활동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2세대 화가(1928-2011)의 작품이다. 

1928년 미국 버지니아주 렉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과 낙서 드로잉, 캘리그래피를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0년대 조르주 브라크 이후, 처음으로 파리 루브르 박물관 천장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점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은 훗날 미국 그래피티 아트를 주도한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와 키스 해링(Keith Haring)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밀워키 아트뮤지엄, 시카고 미술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2002년 소더비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인 560만 유로에 팔리고, 작품 “무제”는 6,960만달라(약753억원)에 팔리는 등미국 최고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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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우 칼럼니스트
jaewooar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