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을 감상하는 일은 음악을 듣는 데서 시작하지만, 때로는 앨범 재킷에 담긴 한 점의 그림을 바라보는 데서 더욱 깊어진다. 턴테이블 위에 음반을 올리고 재킷을 펼치는 순간, 음악과 미술은 서로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작품이 된다.

오늘 소개할 음반은 영국이 자랑하는 싱어송라이터 엘튼 존(Elton John)의 1976년 앨범 《Blue Moves》다. 앨범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그림은 데이비드 호크니와 함께 1960년대 영국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던 화가 패트릭 프록터(Patrick Procktor)의 작품이다.

앨범의 게이트폴드 커버를 장식한 작품은 프록터의 《The Guardian Readers》다. 여러 인물이 한 공간에 앉아 신문을 읽는 일상의 풍경을 담고 있지만, 인물 사이에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과 고요가 흐른다.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각자의 생각에 잠긴 사람들의 모습은 《Blue Moves》에 스며 있는 우울과 고독, 관계의 상실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프록터의 그림과 엘튼 존의 음악은 그렇게 하나의 ‘푸른 움직임’으로 만난다.
데이비드 호크니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세대
패트릭 프록터는 193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성장한 영국의 화가이자 판화가다. 하이게이트 스쿨에서 화가 키핀 윌리엄스에게 그림을 배운 그는 21세 때 자신의 정물화가 레드펀 여름 전시회에 출품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1958년 슬레이드 미술학교에 입학한 프록터는 학생회장을 맡았으며 로저 쿡, 마리오 둡스키, 필립 프라우스 등과 교류했다. 윌리엄 콜드스트림과 키스 본을 비롯한 여러 화가의 영향을 받아 어둡고 구상적인 초기 회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졸업 후 그의 작품은 화이트채플 미술관 관장 브라이언 로버트슨의 눈에 띄었다. 로버트슨의 도움으로 1963년 레드펀 미술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은 출품작이 모두 판매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 프록터는 역동적이면서 추상적인 남성 누드를 주로 그렸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때때로 뒤틀리거나 기형적으로 표현됐는데, 이는 그가 마비 환자들을 돕는 미술치료사로 일했던 경험과도 관련이 있었다. 아름다움을 이상화하기보다 인간의 육체에 새겨진 불안과 연약함을 회화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1964년 프록터는 화이트채플 미술관에서 열린 《새로운 세대(New Generation)》전에 참여했다. 이 전시는 패트릭 콜필드, 데이비드 호크니, 존 호일랜드, 브리짓 라일리 등 12명의 젊은 작가를 소개하며 전후 영국 미술계에 새롭고 다채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렸다.

프록터는 호크니와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지만, 두 사람의 작품 세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호크니가 선명한 색채와 명료한 화면 구성으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면, 프록터는 유화와 아크릴, 수채화와 판화를 넘나들며 보다 섬세하고 서정적인 인물과 풍경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행의 기억을 물들인 수채화
프록터의 작품은 팝아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안에는 여행에서 얻은 경험과 이국적인 정서가 함께 담겨 있다. 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인도, 이집트,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하며 여러 도시의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작품으로 남겼다.

초기의 어둡고 강렬한 누드 회화에서 출발한 그는 1970년대 이후 투명하고 밝은 색채의 수채화를 선보이며 당대 영국을 대표하는 수채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물에 번지는 색채와 여백, 간결한 선을 이용해 여행지의 빛과 공기를 포착했고, 인물을 묘사할 때도 외형보다 그 사람이 머물고 있는 순간의 분위기에 집중했다.

판화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인 그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서사시 《고대 선원의 노래》 1976년 판을 위한 삽화 연작을 제작했다. 회화와 문학, 여행과 일상의 감각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그는 1996년 영국 왕립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2003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The Guardian Readers》는 이러한 작품 세계를 잘 보여준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한 장면이지만, 화면 속 인물들의 자세와 시선, 그들 사이에 놓인 침묵은 한 편의 연극처럼 보인다. 이 그림이 《Blue Moves》의 음악과 만날 때 그 침묵은 더욱 깊고 쓸쓸한 울림을 갖는다.
세 살에 피아노를 시작한 영국의 음악가
엘튼 존은 1947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다섯 살부터 정식으로 교습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인 그는 1958년 영국 왕립음악원 주니어 과정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던 그는 졸업시험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둔 뒤 대중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1962년 리듬앤블루스 밴드 블루솔로지(Bluesology)를 결성해 연주 활동을 시작했고, 1967년 평생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는 작사가 버니 토핀(Bernie Taupin)을 만났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만남은 대중음악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작곡·작사 협업으로 이어졌다. 토핀이 먼저 가사를 쓰면 엘튼 존이 그 글을 읽고 멜로디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출발한 언어와 선율은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결합됐다.
1969년 첫 정규앨범 《Empty Sky》를 발표한 데 이어 1970년 두 번째 앨범
《Elton John》을 선보였다. 이 앨범에 수록된 ‘Your Song’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고, 앨범은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음반과 최우수 남성 팝 보컬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후 엘튼 존은 ‘Levon’, ‘Honky Cat’, ‘Rocket Man’, ‘Crocodile Rock’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1970년대를 대표하는 팝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화려한 의상과 안경,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도 유명했지만 그의 음악을 오랫동안 살아남게 한 힘은 결국 피아노와 목소리,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화려한 성공 뒤에 찾아온 《Blue Moves》
1976년 발표된 《Blue Moves》는 엘튼 존의 정규 11집이자 두 장의 음반으로 구성된 더블 앨범이다. 제목에 담긴 ‘Blue’라는 단어처럼 이 음반에는 이전 작품보다 한층 깊어진 우울과 내면적인 정서가 흐른다.
1970년대 중반까지 엘튼 존은 쉼 없이 앨범을 발표하고 공연을 이어가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피로와 고독, 관계의 상처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Blue Moves》는 그 복잡한 감정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앨범 가운데 하나다.
앨범에는 애절한 발라드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가 수록돼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너무 어려워진 관계의 끝을 노래한 이 곡은 절제된 피아노와 엘튼 존의 쓸쓸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오랜 시간 사랑받았다.
그리고 이 음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곡이 ‘Tonight’이다. 약 8분에 이르는 클래시컬한 대곡으로, 오케스트라의 장중한 전주와 피아노 연주가 천천히 감정의 문을 연다. 격렬하게 감정을 쏟아내기보다 상처받은 관계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곡이다.
“오늘 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을까.”
노래에 담긴 마음은 화려한 팝스타의 독백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더는 자신의 진심을 숨길 수 없게 된 한 인간의 고백에 가깝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넓은 공간과 엘튼 존의 담담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지나간 사랑과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 속 침묵과 음악 속 고독
《Blue Moves》의 커버를 장식한 《The Guardian Readers》에는 음악을 듣는 사람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없다. 인물들은 신문을 펼친 채 각자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함께 있지만 홀로인 듯한 그 모습은 앨범에 담긴 음악의 정서와 닮았다.
프록터는 인물 사이의 침묵을 그렸고, 엘튼 존은 관계 사이에 생긴 침묵을 노래했다. 한 사람은 색채와 선으로, 다른 한 사람은 피아노와 목소리로 고독의 깊이를 표현했다.
앨범의 게이트폴드 커버를 완전히 펼치면 프록터의 그림은 단순한 장식에서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확장된다. 음악을 듣기 전에는 평범한 일상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Tonight’과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를 듣고 다시 바라보면 인물들이 저마다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 듯 느껴진다.
좋은 앨범 커버는 음악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음악이 들어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을 열어준다. 패트릭 프록터의 그림은 《Blue Moves》가 품은 우울과 외로움, 관계의 흔들림을 말없이 보여준다.
늦은 밤, 조명을 조금 낮추고 엘튼 존의 ‘Tonight’을 들어보자. 장중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동안 《The Guardian Readers》의 인물들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한때 이 음악을 들었던 세대에게는 1970~80년대의 추억이 되살아날 것이고,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팝 음악과 회화가 얼마나 아름답게 서로를 비출 수 있는지 발견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래된 음반 한 장에는 노래만 담겨 있지 않다. 한 시대의 미술과 음악, 사람들의 취향과 기억이 함께 새겨져 있다. 패트릭 프록터의 고요한 그림과 엘튼 존의 애절한 선율이 만난 《Blue Moves》는 ‘눈으로 즐기며 듣는 음반’이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최재우
감상곡: Elton John – ‘Tonight’
https://www.youtube.com/watch?v=R-Ly7xgLXGQ&list=RDR-
Ly7xgLXGQ&start_radio=1
앨범 개요

앨범명: 《Blue Moves》
아티스트: 엘튼 존(Elton John)
발매 연도: 1976년
앨범 형식: 정규 11집·더블 앨범
장르: 팝, 록, 소프트 록, 오케스트럴 팝
작곡: 엘튼 존
작사: 버니 토핀(Bernie Taupin) 등
대표곡: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Tonight’,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
앨범 커버 작품: 《The Guardian Readers》
커버 작가: 패트릭 프록터(Patrick Procktor, 1936~2003)
《Blue Moves》는 엘튼 존이 1976년 발표한 정규 11집으로, 두 장의 음반으로 구성된 더블 앨범이다. 화려하고 경쾌했던 이전 작품들에 비해 우울과 고독, 사랑의 상실과 관계의 갈등 등 보다 내면적인 정서를 깊이 있게 담았다.
애절한 피아노 발라드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와 클래식 음악의 장중함을 느낄 수 있는 대곡 ‘Tonight’이 대표곡이다. 패트릭 프록터의 작품 《The Guardian Readers》를 사용한 게이트폴드 커버는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세계에 머무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앨범의 쓸쓸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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