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음반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음악을 듣는 데서만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앨범을 손에 들고 표지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이미 음악이 시작된다. 특히 음악과 시각예술이 긴밀하게 결합한 음반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작품이 된다.
이번 ‘눈으로 즐기며 듣는 이 한장의 음반’에서 소개할 작품은 영국 작가 스탠리 돈우드(Stanley Donwood)의 리놀륨 판화와 라디오헤드(Radiohead)의 보컬 톰 요크(Thom Yorke)가 만난 2006년 솔로 앨범 ‘The Eraser’다.

앨범의 음악만큼이나 강렬한 것은 검은색과 흰색의 선으로 뒤덮인 커버다. 거대한 파도와 먹구름, 물에 잠기거나 불타는 도시의 모습이 이어지고 그 한가운데 작은 인간이 서 있다.

앨범 앞면과 뒷면을 따로 보면 하나의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커버를 길게 펼치면 거대한 판화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 앞·뒷면과 펼친 커버 이미지는 ‘The Eraser’가 단순히 음반을 포장한 디자인이 아니라 판화와 음악이 하나로 이어지는 시각 작품임을 보여준다.
라디오헤드의 또 다른 얼굴, 스탠리 돈우드
스탠리 돈우드의 본명은 댄 릭우드(Dan Rickwood)다. 1968년생인 그는 스탠리 돈우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해 온 영국 작가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전시 활동을 이어왔으며 20년 넘게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의 공식 아티스트로도 활동했다.
그의 회화와 드로잉, 판화에는 사회·정치적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과 풍자가 담긴다. 그의 작업은 호가스, 인사, 뱅크시와 비교할 만한 풍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현재 영국 브라이튼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스탠리 돈우드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톰 요크다.
두 사람은 엑서터대학교(University of Exeter)에서 미술대학 학생으로 만났다. 당시 맺어진 인연은 훗날 세계적인 록 그룹 라디오헤드의 앨범 아트워크와 톰 요크의 솔로 앨범으로까지 이어졌다. 음악가와 미술가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두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물 안에서는 소리와 이미지가 오랫동안 하나의 언어처럼 움직였다.
목판보다 부드러운 리놀륨 위에 새긴 ‘London Views’
돈우드의 작업 가운데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가 판화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재료는 리놀륨(Linoleum)이다. 리놀륨은 볼록판화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목판보다 비교적 부드럽고 작업하기 편한 특성을 갖는다. 돈우드는 이 재료를 이용해 2006년 ‘London Views’라는 연작을 선보였다.

이 시리즈는 화재와 홍수로 파괴된 런던의 여러 랜드마크를 묘사한 14점의 리놀륨 판화로 구성됐다. 작품들은 런던의 Lazarides Gallery에서 전시됐으며, 바로 이 연작 가운데 한 작품이 톰 요크의 첫 솔로 앨범 ‘The Eraser’의 커버로 사용됐다. ‘London Views’ 판화의 일부를 바라보면 이 연작의 분위기가 더욱 분명하게 전달된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아래에서는 파도가 끝없이 굽이친다. 거대한 물결 사이로 배와 건축물, 도시의 구조물들이 휘청이고, 일부 지역에서는 불길이 치솟는다. 자연과 도시가 충돌하면서 인간이 구축한 문명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얼마나 위태로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듯한 풍경이다.
특히 일정한 방향으로 반복되는 수많은 선은 물결과 바람, 구름에 운동감을 부여한다. 흑백이라는 제한된 색채 안에서도 이미지가 정지돼 있기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앨범 커버를 펼쳤을 때 이러한 풍경은 좌우로 길게 이어진다. 한 장의 커버 안에 도시와 파도, 불과 구름이 펼쳐지면서 음반 그 자체가 한 폭의 긴 판화가 된다.
스탠리 돈우드의 리놀륨 판화를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판화 역시 떠올려 볼 수 있다.
강과 산을 아름답게 담아온 우리나라 목판화의 대가 김억 작가의 작업도 함께 기억하자고 언급한다. 서로 다른 지역과 시대의 풍경이지만, 판이라는 매체 위에 수많은 선을 새겨 세상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연결점이 생긴다.
라디오헤드의 보컬에서 솔로 뮤지션으로
‘The Eraser’의 주인공 톰 요크는 얼터너티브 록 그룹 라디오헤드의 멤버이자 리드 보컬로 알려져 있다.

1968년생인 그는 영국 옥스퍼드셔의 애빙던 스쿨에서 학우들과 함께 라디오헤드를 결성했다. 라디오헤드는 1993년 데뷔 앨범의 싱글 ‘Creep’이 크게 성공하면서 브리티시 록의 전통을 이어갈 그룹으로 주목받았다.
톰 요크는 보컬뿐만 아니라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보컬리스트로서는 폭넓은 음역으로 알려졌으며, 롤링스톤이 그를 “이 시대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가수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2006년 발표된 ‘The Eraser’는 그의 첫 솔로 앨범이다.
라디오헤드라는 거대한 이름 안에서 활동해 온 톰 요크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이 음반은 영국과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톱10에 진입했다. 또한 2006년 머큐리 프라이즈와 2007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얼터너티브 음악 앨범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음악을 듣기 전에 이미 시작되는 ‘The Eraser’
‘The Eraser’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음악과 미술 가운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단순히 장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스탠리 돈우드의 ‘London Views’는 독립된 판화 작품이면서 동시에 ‘The Eraser’의 얼굴이 됐다. 앨범을 손에 들고 앞뒤로 돌려보고, 커버를 길게 펼치는 행위 자체가 작품 감상의 일부가 된다.


앨범 앞면을 보면 압도적인 물결 앞에 검은 실루엣의 인물이 서 있다. 인물은 거대한 파도를 통제하려는 듯 팔을 뻗고 있지만, 주변을 가득 채운 선과 파도의 규모에 비하면 너무나 작다. 뒷면에는 물과 불길에 휩싸인 도시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두 장면을 펼쳐놓으면 서로 분리돼 있던 풍경이 하나의 긴 서사로 연결된다. 그 때문에 이 앨범을 바라보다 보면 ‘커버’라는 말보다 ‘작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은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판화는 한순간의 장면을 붙잡는다. 그러나 ‘The Eraser’에서는 움직이는 음악과 정지된 그림의 경계가 흐려진다. 반복되는 선은 마치 소리의 파형처럼 보이고, 끝없이 밀려드는 검은 물결은 음악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불안을 시각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눈으로 먼저 만나고, 귀로 다시 만나는 음반
좋은 앨범 커버는 음악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음악을 듣기 전에 하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스탠리 돈우드의 리놀륨 판화와 톰 요크의 ‘The Eraser’가 그렇다.
앨범을 펼치면 도시와 바다, 불길과 먹구름이 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그 풍경을 본 뒤 음악을 들으면 우리는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앞서 보았던 검은 선과 파도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한 명은 소리를 만들고 한 명은 이미지를 새겼다. 대학 시절 만난 톰 요크와 스탠리 돈우드의 인연은 그렇게 한 장의 음반 위에서 다시 만났다.
2006년의 ‘The Eraser’.
눈으로 먼저 감상하고 귀로 다시 듣는 음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한 장이다.
음반 개요
앨범명 : The Eraser
아티스트 : Thom Yorke
발표연도 : 2006년
구분 : 톰 요크 첫 솔로 앨범
앨범 커버 아티스트 : Stanley Donwood
관련 판화 연작 : London Views
판화 기법 : Linocut(리놀륨 판화)
주요 성과 : 영국·아일랜드·미국·캐나다·호주 톱10 진입, 2006 머큐리 프라이즈 후보, 2007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얼터너티브 음악 앨범 부문 후보
글 ㅣ 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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