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 필자는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자리한 롯데뮤지엄을 찾았다.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이 열리는 전시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의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눈앞에서 생겨나는 감각에 집중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커다란 화면을 가로지르는 붓질 사이로 배 한 척이 떠오른다. 다른 그림에서는 몇 번의 선이 새의 몸짓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형상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선은 다시 물감의 번짐과 붓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움직인다. 무엇이 그려졌는지보다 어떻게 나타나고 흩어지는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전시 제목인 ‘일어나고 사라지는’은 그렇게 작품을 읽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이강소 전시포스터

이번 전시는 2026년 8월 21일부터 11월 1일까지 이어진다. 회화와 조각, 사진과 영상, 퍼포먼스를 연결하며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한 행위와 흔적, 시간의 문제를 살펴본다. 서로 다른 매체를 함께 만나는 구성은 이강소의 회화를 초기 실험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도록 이끈다.

 

이강소는 1943년 태어나 1965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현장에서 활동했으며,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관심은 일찍부터 그림의 표면을 넘어 사람과 사물,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향했다.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가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닭을 이용한 작업이다. 분필 가루가 놓인 공간을 닭이 움직이며 남기는 발자국은 작가가 미리 그려놓은 선과 달랐다. 살아 있는 존재의 움직임과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이 작품에 개입했다. 미술의 범위를 넓힌 이 실험은 훗날 그의 붓질과 조각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전시장에 펼쳐진 회화에서는 이 같은 질문이 물감과 여백의 관계로 이어진다. 회색과 검정이 겹친 화면에는 붓털이 스친 결이 남아 있고, 아래로 흘러내린 물감은 붓질 이후에도 계속된 시간을 보여준다. 그 사이에 놓인 밝은 배의 형상은 주변의 거친 흔적과 만나면서 고요함과 움직임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이강소 作

붉은 선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작품에서는 또 다른 리듬이 느껴진다. 선은 어느 순간 동물의 윤곽처럼 보이다가도 곧 물감이 지나간 길로 돌아간다. 관람자는 형태를 찾아내는 즐거움과 형태를 놓아주는 자유 사이를 오가게 된다.

이강소 作

롯데뮤지엄은 이강소의 화면에 등장하는 오리와 사슴, 배를 만물의 기운이 잠시 머무는 매개로 설명한다. 절제된 선과 넓은 여백을 함께 바라보면, 그 형상들은 화면을 채우는 소재를 넘어 주변 공간에 움직임을 불어넣는 존재로 읽힌다.

 

특히 여백은 오래 바라볼수록 달리 보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처럼 느껴지지만, 붓질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선과 선 사이에 거리와 깊이가 생긴다. 한 번의 획이 강하게 남아 있을수록 그 곁의 빈 공간도 또렷해진다. 그림을 보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전시 전경

푸른색과 초록색,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색띠가 등장하는 화면은 흑백 회화와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색면 위를 가로지르는 밝은 붓질은 아래의 색을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가린다. 물과 빛, 공기의 흐름을 떠올릴 수 있지만 어느 하나의 풍경으로 고정하기는 어렵다. 보는 위치와 시선의 방향에 따라 화면의 중심도 조금씩 달라진다.

전시 전경

조각이 놓인 공간에서는 회화에서 보았던 긴장과 느슨함을 입체로 만나게 된다. 흙빛과 백색, 회색의 덩어리들은 기울거나 포개지고, 눌린 자국과 벌어진 틈을 그대로 드러낸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외형보다 재료가 힘을 받은 순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강소는 흙을 던지거나 쌓은 흙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통해 우연과 중력이 개입하는 조각을 전개해왔다. 재료의 반응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방식은 몸과 붓, 물감이 만나는 회화의 태도와도 이어진다.

 

전시장 중앙의 조각들 사이로 드리워진 얇은 천은 공간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다. 천 너머의 작품이 희미하게 비치고, 걸음을 옮기면 가려졌던 형태가 다시 나타난다. 작품의 표면에서 시작된 ‘보임과 가려짐’의 문제가 관람자의 동선으로 확장되는 장면이다.

전시 전경

어두운 공간에 설치된 흰 식물 형상의 풍경도 인상적이다. 빛을 받은 가느다란 줄기와 이삭 같은 형태가 거울 속에 반복되면서 실제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를 만든다. 눈앞의 대상과 반사된 이미지가 맞물린 풍경 속에서 관람자 자신의 모습 역시 공간의 일부로 들어온다.

전시 전경

길게 매달린 붓과 그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시선이 도구로 돌아온다. 캔버스에 남은 커다란 획을 본 뒤 바라보는 붓은 단순한 제작 도구 이상으로 다가온다. 붓의 길이와 무게, 그것을 움직였을 몸의 동작을 상상하면서 화면 위 흔적을 새롭게 떠올리게 된다.

이강소 作

이처럼 이번 탐방에서 만난 작품들은 서로 다른 재료와 형식을 지니면서도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됐다. 무엇이 하나의 형상을 만들며, 그 형상은 어디까지 지속되는가. 작품 앞에 머무는 동안 관람자의 기억과 연상도 그 질문에 참여한다.

 

이러한 감상을 품어내는 롯데뮤지엄의 공간에도 눈길이 간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7층에 자리한 미술관은 내부의 곡면을 살려 작품과 공간이 유연하게 이어지도록 구성했다. 공식 소개에서도 일상 속에서 예술을 경험하고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공간을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강소 作

실제로 긴 전시 공간에서는 작품들을 서로 비교하며 볼 수 있고, 곡선으로 이어지는 벽면에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화면과 마주한다. 중앙의 벤치는 잠시 앉아 그림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한다. 작품 가까이에서 물감의 결을 살피던 시선이 멀리서 화면 전체를 보는 시선으로 바뀌면서 감상의 폭도 넓어진다.

 

쇼핑과 식사, 여가를 즐기는 도심의 복합문화공간 안에서 이러한 미술관을 만나는 일은 특별하다. 일상의 동선으로 찾아온 관람자가 작품 앞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익숙하게 보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10월 10일의 방문을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몇 점의 대표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붓이 지나간 결, 조각 사이의 틈, 거울 속에서 거듭 나타나는 풍경이 함께 떠오른다. 이강소의 전시는 작품을 이해하는 일이 반드시 하나의 정답에 도착하는 과정일 필요는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화면 위의 형상은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붓질 속으로 스며든다. 관람자의 시선도 그 움직임을 따라 머물고 옮겨간다. 롯데뮤지엄에서 만난 ‘일어나고 사라지는’ 풍경은 그렇게 전시장을 나온 뒤에도 기억 속에서 천천히 다른 모습을 만들어간다.

 

전시 개요

 

전시명: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
영문명: Lee Kang So: Emergence and Dissolution
참여 작가: 이강소
전시 기간: 2026년 8월 21일~11월 1일
전시 장소: 롯데뮤지엄, 롯데월드타워 7층
주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300
관람 시간: 오전 10시 30분~오후 7시
입장 마감: 오후 6시 30분
관람료: 성인 20,000원, 청소년·어린이 13,000원, 만 3세 미만 무료
문의: 1544-7744
홈페이지: 롯데뮤지엄 LOMA 

이강소 작가 프로필

 

성명: 이강소(李康昭, Lee Kang So)
출생: 1943년
학력: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작업 분야: 회화, 조각, 설치, 사진, 판화, 영상, 퍼포먼스

이강소는 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을 이끈 주요 작가로,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행위와 흔적, 우연과 시간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1970년 미술 동인 ‘신체제’ 창립 멤버로 활동했으며,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는 살아 있는 닭이 움직이며 남기는 흔적을 작품으로 제시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1980년대 이후에는 회화를 중심으로 초기 실험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화면에 등장하는 오리와 사슴, 배 등의 형상은 간결한 붓질과 여백 속에서 자연의 기운과 움직임을 전한다. 회화와 조각을 관통하는 핵심은 재료와 신체, 주변 환경이 만나 예측할 수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다.

주요 활동: 국립 경상대학교 교수,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올버니 객원 교수·객원 예술가, 뉴욕 현대미술관 PS1 스튜디오 아티스트 프로그램 참여
주요 전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국립현대미술관·뉴욕 구겐하임미술관·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 순회전 등
주요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선재미술관,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일본 미에현립미술관 등

이강소 홈페이지: ropa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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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택 기자 dream-kaz@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