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존 한미숙 객원기자 입력 2026.10.29 16:39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은 세계 미술계의 변방을 넘어 국제적 담론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파리에서 36년간 활동해 온 이배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가다. 한국의 문화적 기억을 숯과 검은색이라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전환해 온 그의 여정을 통해 한국 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묻는다.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이배는 홍익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1990년 파리에 정착했다. 1990년대 초 파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갤러리 RX와 페로탕을 통해 프랑스 및 국제 미술계에서 입지를 넓혀왔다. 2015~2016년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열린 《Carte blanche à Lee Bae》, 2018년 페로탕의 《Black Mapping》, 2022년 《Le noir en constellation》은 숯과 검은색을 향한 그의 지속적인 탐구를 보여준다.
숯의 물질성과 불의 흔적을 회화와 조각, 설치로 확장해 온 이배. 그의 작업에서 숯은 단순한 재료를 넘어 시간과 생명, 소멸과 생성의 감각을 담아내는 조형 언어가 된다. 현재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그는 한국적 문화의 기억을 동시대 추상미술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이번 인터뷰는 전시 이력이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낯선 문화와 언어가 교차하는 파리에서 그는 어떻게 자신의 뿌리를 새롭게 발견했을까? 한국의 전통적 재료인 숯은 어떤 과정을 거쳐 국경을 초월한 조형 언어가 되었을까? 이배의 36년 파리 여정을 따라가며, 한 작가의 예술적 선택과 변화 속에서 한국 미술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파리 - 낯선 도시가 열어준 시선
파리에 처음 왔을 때, 한국과 가장 달랐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비로소 발견한 자신의 모습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해외에서 일어나는 미술 운동과 새로운 미술에 대한 동경이 컸습니다. 1970~80년대 한국에서는 해외 미술에 관한 정보를 접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궁금증도 많았지요. 그런데 파리에 오니 오히려 제 자신의 정체성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작가로서 파리 미술계에서 어떻게 제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이며 어떤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어떤 방식으로 사유하는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었어요. 한국에서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바라보았다면, 파리에서는 그 시선을 제 자신에게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에서의 시간은 저를 되돌아보고 예술가로서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일종의 재정비의 시간이었습니다.
올해로 파리 생활 36년째를 맞았습니다. 1990년 처음 파리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파리의 예술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1990년 파리에 처음 왔을 때는 물가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생활하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물가가 크게 올라 외국의 젊은 작가들이 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작업실을 구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졌고요. 창작을 위한 생활 여건은 과거보다 나빠졌지만, 미술 시장의 상업적 환경은 오히려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파리는 국제 미술 시장의 중심지로서 점차 입지를 다져가고 있어요. 세계적인 전시가 열리고 유명 작가들도 많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술 시장이 성장하는 것과 젊은 작가들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파리는 국제적인 미술 활동의 중심지이지만, 젊은 작가들이 창작 열정을 이어가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도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방인 -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경험은 예술적 자유를 넓혀주었나요, 아니면 극복해야 할 조건이었나요?
이방인의 삶은 자의적인 선택은 아니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아가게 합니다. 그만큼 외롭고 쓸쓸하며 고독한 면이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환경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확장하고, 세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극복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것은 동시대의 흐름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동시대성’이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정신적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대 사람들과 직접 교감하지 못하면 예술이 지나치게 주관적인 사고나 관습에 갇힐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보편성과 공감력도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지 사회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독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동시에, 동시대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작가로, 프랑스에서는 외국인 작가로,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의 차이는 작가의 작업과 한국 미술의 국제적 소통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시나요?
오늘날 한국 작가들에게는 국내에서 인정받는 것을 넘어 해외에서 한국 작가로 인정받고 활동 영역을 넓히려는 현실적인 지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 가운데 뛰어난 작가들이 많습니다. 저는 한국인의 감성에는 몬순 기후 지역에서 오랜 시간 형성된 특별한 문화적 감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우리만의 특성으로 간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롭게 소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과 해외의 시선 차이에만 주목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소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작가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그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적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그 틀에 갇히지 않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해 오셨습니까?
오늘날은 어느 시대보다도 다양한 문명권이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한국적 정체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고 신선하게 제시하는 방법론과 개념을 갖추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지나치게 민족적이거나 지역적인 특성만을 부각하면 서로 대화하기 어렵고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힘듭니다. 우리의 것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방법론과 개념을 접목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고민을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숯 - 고향의 기억에서 세계의 언어로
파리에서 숯을 접한 뒤, 그 안에서 한국의 문화적 뿌리를 새롭게 발견했다고 하셨는데, 작가님에게 숯은 어떤 의미를 지닌 재료인가요?
1991년 파리에서 숯을 접한 이후, 숯은 지금까지 작가로서의 제 정체성을 담아내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숯 자체가 제게 한국 문화의 뿌리를 가져다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숯에 한국 문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덧입힌 것이지요. 저는 숯에 한국의 향기를 투영했고, 숯을 통해 한국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거대한 문명을 유럽에 이해시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숯입니다.
제 작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순환’입니다. 자연과 나 사이의 순환이기도 하고, 생명과 죽음, 그리고 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 흐르는 정신이기도 합니다. 숯은 그러한 정신을 표현하는 재료이자 제 삶의 흔적을 기억하는 재료입니다. 결국 숯과의 만남을 통해 제가 구축해 온 것은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순환의 구조,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숯에는 서예와 먹, 전통 가옥, 출생 의례 등 우리 문화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해외 관객은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한 채 작품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문화적 맥락을 모르는 관객도 작품과 온전히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외국 관객들은 숯에 담긴 우리 문화의 깊은 의미를 잘 모르지만, 그 자체에는 관심을 보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러한 관심을 활용해 숯이 한국 문화의 어떤 배경과 의미를 지니는지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숯을 통해 작가로서의 저를 알리고 한국 문화의 근간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문화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현재 한국의 청도와 파리를 오가며 작업하시는데, 작가에게 고향 청도와 타향 파리는 각각 어떤 의미이며, 두 공간은 작품 안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일 년 중 약 6개월은 파리에서, 나머지 6개월은 한국에서 보내며 작업합니다. 고향 청도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저를 형성한 환경, 음식, 사유의 근원을 돌아보는 곳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치 조상 앞에 서서 제 본질을 되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파리는 화랑 관계자와 작가, 컬렉터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는 곳입니다. 청도에서 숯과 작품을 만들고, 그 결과물을 파리를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 선보입니다. 이렇게 고향과 타향을 오가는 여정은 제 작업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중요한 환경입니다.
정체성 - 한국인 작가를 넘어 보편적 예술로
세계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출신국과 문화를 통해 작품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품이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범주로 소개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되고, 어떤 점에서 한계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한국 미술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단색화를 통해 국제적인 인지도를 크게 넓혔습니다. 저 역시 한국 단색화의 국제적 인기가 제 작품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1970년대 한국의 어려운 사회·정치적 환경 속에서도 독자적인 미술 운동을 일궈낸 선배 작가들의 성과 덕분입니다. 저는 단색화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온 작가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한국 현대미술이 더욱 널리 확산되기를 바라며, 국내 미술계 역시 기존의 틀에 머물지 않고 더 다양하고 새로운 미술 운동을 활발히 펼쳐 나갔으면 합니다.
고향은 돌아가야 할 장소인가요, 아니면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하는 장소
인가요?
지금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외부로 나가 활동하고 싶다는 열정이 있습니다. 낯선 곳은 두려운 공간이기도 하고, 나를 환대하기보다 경계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살아가려면 스스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자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저는 외부로 나가는 경험이 자신을 확장하고 새롭게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외부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내부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더 많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세계로 나아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넓혀가기를 바랍니다.

피에르 술라쥬(Pierre Soulages, 1919~2022)와 작가님은 모두 검은색을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탐구해 왔습니다. 두 작가의 검은색은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달라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술라쥬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 남프랑스 로데즈에 있는 술라쥬 미술관과 콩크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면서, 그가 검은색과 빛의 관계를 얼마나 깊이 탐구했는지 다시 느꼈습니다.
술라쥬가 검은색의 물성을 통해 빛과의 관계를 탐구했다면, 저는 숯 자체가 지닌 물성과 빛의 반응에 주목합니다. 숯은 빛을 흡수하면서도 반사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검은색의 깊이와 빛의 반응도 달라집니다. 두 작가는 검은색을 통해 빛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저에게 검은색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숯이라는 물질의 고유한 특성과 빛이 함께 만들어 내는 조형 언어입니다.
작가님에게 숯과 먹은 전통 동양회화의 정신을 계승하는 재료인가요? 그렇다면 이를 현대미술의 언어로 어떻게 확장하고 계십니까?
동양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붓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손대지 않는 것입니다. 붓과 종이, 신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작품이 탄생합니다. 동양의 예술은 오랫동안 인격과 정신을 수련하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전통의 정신과 방법을 숯을 통해 현대미술의 언어로 새롭게 이어가고자 합니다.
정체성에서 보편성으로
작가님에게 예술 창작은 어떤 시간이며,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과 무엇을 나누고 싶으십니까?
제 작품이 반드시 한국적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창작은 지식이나 경험을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맑은 영성과 순수한 감성에 온전히 몰입하는 과정입니다. 저에게 작품을 만드는 시간은 영성을 수련하고 기도하는 시간과도 같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저 자신이 새로워지고 예술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제 작품이 세상과 만날 때, 완성된 결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창작의 시간과 과정까지 함께 소통되기를 바랍니다.
뿌리에서 세계로
이배의 작업은 한국적 정체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세계 미술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한국적 정체성은 작품에 반드시 드러내야 할 표지가 아니라,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찾아가는 출발점이다. 그는 한국의 문화적 기억과 맞닿아 있는 숯을 선택했지만, 이를 전통의 재현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숯의 물성과 빛, 신체의 행위와 창작의 시간을 탐구하며 동양회화의 정신을 현대 추상의 언어로 확장해 왔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숯은 이배의 작업을 통해 전통적 재료의 의미를 새롭게 읽게 하는 동시에, 국제 미술계와 소통하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가 되었다. 서양 현대추상의 관점에서도 그의 작품은 검은색과 빛, 물질과 흔적이라는 보편적 질문을 던진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뿌리에서 출발해 다른 문화권의 관객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예술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이다.
현재 파리 페로탕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배의 개인전 《Attending》은 2026년 12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숯과 검은색을 중심으로 발전시켜 온 그의 예술 세계를 회화와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로 확장해 보여준다.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세계, 물질과 정신 사이를 오가며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해 온 이배. 그의 작업은 정체성을 과거의 유산으로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여는 힘으로 바꾸어 놓는다. 한국에서 출발했지만 한국이라는 경계에 갇히지 않는 것, 이배의 예술이 보여주는 정체성의 미래다.
LEE Bae - Attending (이배 파리 페로탕 개인전)
전시 기간 : 2026년 10월 17일 ~ 12월 19일
장소 : Perrotin Paris, 76 rue de Turenne, 75003 Paris
개관 시간 : 화요일–토요일, 10:00 ~ 18:00
입장료 : 무료, 예약 없이 관람 가능
글 l 한미숙 (mms7han@yahoo.com)
프랑스존·한위클리 객원기자
현) 파리미술사연구소(Since 2014) 대표
현) 파리 C3B 서양미술사. 한국미술사 강의 13년 차
전)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전시 번역가
출처: 파트너미디어 '프랑스존'
임만택 기자 dream-kaz@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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