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ㅣ 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한 장의 음반은 음악만 담고 있지 않다. 때로는 한 시대의 미술과 디자인, 사회적 기억까지 한 장의 표지 안에 품는다.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 1971년앨범 “Surf’s Up”

이번에 소개할 음반은 미국을 대표하는 밴드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가 1971년 발표한 앨범 《Surf’s Up》이다. 이 앨범의 커버는 미국 조각가 제임스 얼 프레이저(James Earle Fraser, 1876~1953)의 대표작 ‘길의 끝(End of the Trail)’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푸른 파도와 햇빛, 해변을 달리는 젊음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비치 보이스의 음악을 떠올린다면 《Surf’s Up》의 표지는 다소 의외다. 고개를 숙인 채 지친 말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의 모습은 찬란한 캘리포니아의 햇살보다 쇠락과 상실, 역사의 무게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그 강렬한 이미지의 뿌리가 제임스 얼 프레이저의 조각 ‘길의 끝’이다.

 

조각으로 기록된 미국의 기억

 

제임스 얼 프레이저는 20세기 전반 미국 조각계를 대표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각가 제임스 얼 프레이저(James Earle Fraser)

어린 시절 사우스다코타주 미첼 인근에서 석회암 조각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890년 시카고 미술연구소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이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공부하며 유럽 조각의 전통을 익혔다. 경력 초기에는 리처드 보크와 오거스터스 세인트고든스의 조수로 일했고, 1902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었다. 1906년부터는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훗날 교장을 맡기도 했다.

제임스 얼 프레이저(James Earle Fraser)조각 작품 “길의 끝(End of the Trail)”

그의 대표작 ‘길의 끝’은 미국 서부 개척의 이면에 존재했던 상실과 소멸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말을 탄 인물은 승리한 개척자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말과 사람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고, 길고 지친 여정이 마침내 막다른 곳에 이른 듯한 정서가 작품 전체를 감싼다.

 

이 작품은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를 위해 제작됐다. 당초 청동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자재 부족으로 계획이 실현되지 못했고, 석고 작품은 이후 캘리포니아 비살리아의 무니스 그로브 공원으로 옮겨졌다. 야외에 장기간 노출되며 손상이 진행됐던 작품은 1968년 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유산 박물관으로 옮겨져 복원됐고, 현재 오클라호마시티 박물관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제임스 얼 프레이저 조각 작업이 베이스 틀이 된미국 주화

프레이저의 예술은 기념조각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미국 대법원과 국립기록보관소를 위한 조각, 미국 재무부와 관련된 인물 조각, 제2사단 기념비를 비롯해 국가적 성격의 여러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승리 메달과 해군 십자훈장, 미국의 유명한 인디언 헤드 니켈, 이른바 버팔로 니켈 디자인에도 그의 조형세계가 반영됐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미국 미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미국 디자인아카데미와 미국 조각협회, 뉴욕 건축가연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25년에는 뉴욕 건축가연맹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미국 미술과 공공조각 분야에서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조각을 음반의 얼굴로 바꾼 에드 스래셔

 

《Surf’s Up》의 표지를 만든 인물은 아트 디렉터이자 사진가, 디자이너인 에드 스래셔(Ed Thrasher, 1932~2006)다. 그는 프레이저의 ‘길의 끝’을 모티프로 삼아 회화적인 앨범 커버 이미지를 제작했다.

앨범 커버 작가 에드 스래셔(Ed Thrasher)

스래셔는 한국전쟁 당시 미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1957년부터 음반 커버와 영화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앨범 디자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그래미 앨범 커버 부문에 여러 차례 후보로 올랐고, 1975년에는 그래미 앨범 패키지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가 《Surf’s Up》에서 선택한 이미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1960년대의 밝고 낙천적인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기억되던 비치 보이스의 이미지와 ‘길의 끝’이 가진 어둡고 침잠한 정서가 충돌하면서 강한 긴장을 만든다.

 

초기 비치 보이스의 세계가 태양과 바다, 자동차와 젊음이었다면 1971년의 《Surf’s Up》은 그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곳을 바라보고 있다. 앨범 제목만 보면 다시 서핑 음악의 세계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지지만, 표지 속 인물에게서 파도를 향해 달려가는 젊음의 활력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한 시대의 끝과 상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성찰이 느껴진다.

 

캘리포니아의 햇빛에서 내면의 바다로

 

비치 보이스는 브라이언 윌슨이 남동생 칼 윌슨과 데니스 윌슨, 사촌 마이크 러브, 고등학교 동창 알 자르딘과 함께 1961년 결성한 밴드다. 작곡과 프로듀싱을 주도했던 브라이언 윌슨은 캘리포니아의 청년문화와 서핑문화를 음악에 적극적으로 담아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Surfin’ USA’를 비롯해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비치 보이스는 ‘서프 뮤직’을 대표하는 밴드로 성장했다. 1960년대 세계 대중음악계를 뒤흔들던 비틀스와 함께 거론될 만큼 큰 인기를 누렸으며, 30여 곡을 빌보드 차트 40위권에 올렸다. 19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러나 밴드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브라이언 윌슨의 고통도 존재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이후 건강 문제와 약물 문제로 무대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작곡과 스튜디오 작업을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말년에는 건강이 크게 악화됐으며 2025년 6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브라이언 윌슨의 음악을 따라가다 보면 비치 보이스를 단순히 ‘서핑 음악을 부른 밴드’라고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젊은 날의 환희와 낙관 뒤에는 고독과 불안, 사라져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자리한다. 그런 점에서 《Surf’s Up》의 표지는 비치 보이스가 걸어온 변화의 궤적을 한 장면으로 압축한다.

 

‘길의 끝’에서 다시 듣는 《Surf’s Up》

 

음반 커버 속 말과 인물은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지 않는다. 머리를 떨어뜨린 말은 지쳐 있고, 그 위의 인물 역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프레이저의 조각이 오랜 세월 미국의 역사적 기억과 상실을 떠올리게 했다면, 스래셔가 재해석한 《Surf’s Up》의 표지는 1960년대의 찬란했던 청춘문화가 1970년대로 넘어가며 마주한 변화와 피로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음반은 제목과 표지가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Surf’s Up’이라는 말에서는 곧 파도가 밀려오고 젊은이들이 바다로 뛰어들 것 같은 설렘이 느껴진다. 그러나 표지에는 파도도, 해변도, 서핑보드도 없다. 대신 모든 움직임이 멈춘 듯한 한 인물과 한 마리의 말이 존재한다.

 

그 역설이 이 앨범을 더욱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미술은 음악을 설명하고, 음악은 다시 미술에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제임스 얼 프레이저의 조각이 에드 스래셔의 디자인을 거쳐 비치 보이스의 음악과 만나는 순간, 1915년의 조각과 1971년의 록 음악은 서로 다른 시대를 넘어 하나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한 장의 음반을 바라본다는 것은 때로 음악 바깥의 세계까지 듣는 일이다. 비치 보이스의 《Surf’s Up》을 다시 꺼내 듣는다면 먼저 표지를 잠시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고개 숙인 기수와 지친 말, 그리고 그 뒤에 놓인 미국 현대사의 시간까지 바라본 뒤 음악을 듣는다면, 이 앨범은 이전과 조금 다른 목소리로 들려올 것이다.

 

앨범 개요

앨범명: Surf’s Up
아티스트: The Beach Boys
발표연도: 1971년
앨범 커버 디자인: Ed Thrasher
커버 모티프: James Earle Fraser, ‘End of the Trail’
추천 감상곡: ‘Surf’s Up’, ‘Disney Gir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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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우 칼럼니스트 jaewooar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