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오랜 삶과 함께해 온 막걸리는 단순한 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농부에게는 고된 노동을 달래는 새참이었고, 서민에게는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었으며, 이웃에게는 마음을 나누고 화해하는 소통의 매개체였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막걸리의 가치를 오덕(五德)과 삼반(三反)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다섯 가지 덕목과 세 가지 사회적 성격을 통해 막걸리가 지닌 생활의 지혜와 공동체 정신을 설명한 것이다.

특히 막걸리를 사랑했던 시인 천상병 (1930~1993)의 삶과 시를 함께 살펴보면, 막걸리가 왜 서민의 술이자 삶의 즐거움으로 사랑받아 왔는지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천상병 시인에게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밥이었다
천상병은 가난하고 소박한 삶 속에서도 세상을 향한 순수한 시선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다. 대표작 「귀천(歸天)」에서 드러나듯, 그는 인생을 지나치게 무겁게 바라보기보다 주어진 삶의 순간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려 했다.
그에게 막걸리는 이러한 인생관과 맞닿아 있었다.
천상병은 「막걸리」라는 제목의 작품들을 남겼으며, 막걸리를 밥과 같은 존재이자 삶의 기쁨을 더해주는 은총으로 예찬했다. 그의 시에는 막걸리를 조금씩 마시며 배를 든든하게 하고 기분 좋은 시간을 누리는 소박한 행복이 담겨 있다.
이는 술에 취하는 즐거움보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행복을 중요하게 여겼던 시인의 삶을 보여준다. 천상병에게 막걸리 한 잔은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가까이 있는 행복이었으며, 가난한 일상에서도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벗이었다.
막걸리의 오덕(五德), 다섯 가지 삶의 지혜
예로부터 전해지는 막걸리의 오덕은 절제와 생활, 활력, 화해와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다.
첫째, 일덕(一德)은 절제의 미덕이다.
취하되 인사불성에 이를 정도로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술에 자신을 맡기기보다는 적절한 선에서 즐기며 스스로를 지키는 절제의 정신을 말한다. 천상병 시인이 막걸리를 한꺼번에 마시기보다 조금씩 즐겼다는 일화와도 통하는 대목이다.
둘째, 이덕(二德)은 요기의 미덕이다.
농사일을 하다가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시면 허기를 달랠 수 있다는 뜻이다. 막걸리는 농경사회에서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노동과 일상에 밀접하게 연결된 음식문화의 일부였다. 천상병 시인이 막걸리를 밥에 비유했던 것도 이러한 전통적 인식과 맞닿아 있다.
셋째, 삼덕(三德)은 활력의 미덕이다.
힘이 빠졌을 때 막걸리 한 잔으로 기운을 돋운다는 의미다. 이는 막걸리를 마시며 고된 노동의 피로를 잠시 잊고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서민들의 생활 경험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다만 이러한 전통적 예찬이 술의 피로 회복이나 건강 증진 효과를 의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 사덕(四德)은 여유와 화해의 미덕이다.
잘 풀리지 않던 일도 막걸리를 나누며 넌지시 웃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세상일을 지나치게 각박하게 대하지 않고, 웃음과 여유로 어려움을 풀어가는 지혜가 담겨 있다. 천상병 시인이 추구했던 소박하고 자유로운 삶의 태도와도 연결해 볼 수 있다.
다섯째, 오덕(五德)은 나눔과 소통의 미덕이다.
사람들이 함께 막걸리를 마시면 마음속에 쌓였던 응어리가 풀린다는 의미다. 농촌에서는 큰 잔에 막걸리를 따라 이웃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크고 작은 갈등을 풀곤 했다. 이러한 풍습은 막걸리를 공동체의 정을 나누는 술로 인식하게 한 배경이 됐다.
막걸리의 삼반(三反), 서민과 평등의 정신
막걸리에는 오덕과 함께 삼반(三反)이라는 전통적 해석도 전해진다. 삼반은 반유한적(反有閑的), 반귀족적(反貴族的), 반계급적(反階級的)이라는 세 가지 성격을 가리킨다.
첫째, 반유한적이란 노동하는 사람들의 술이라는 의미다. 막걸리는 한가롭게 놀고먹는 사람보다 땀 흘려 일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일상에 깊이 뿌리내린 술이었다.
둘째, 반귀족적이란 신분이나 부귀보다 소박한 삶의 가치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값비싼 술보다 서민들이 함께 즐기는 막걸리에 친숙함과 정겨움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셋째, 반계급적이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넘어 함께 마시는 평등의 정신을 의미한다. 막걸리 한 사발 앞에서는 사회적 지위보다 인간적인 교류와 공동체의 유대가 중요했다.
이러한 삼반의 정신은 막걸리가 오랫동안 서민의 술로 사랑받아 온 문화적 배경을 설명해 준다.
향음주(鄕飮酒), 막걸리 한 잔에 담긴 공동체 문화
우리 전통사회에서 술은 개인의 즐거움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특히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를 나누는 풍습에는 공동체의 화합과 상호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막걸리를 넉넉하게 따라 서로 권하며 일상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오해와 갈등을 풀어가는 모습은 우리 농경사회의 정겨운 풍경이었다. 이런 점에서 막걸리는 단순히 마시는 술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를 이어주는 문화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병의 막걸리 예찬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천상병 시인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세상이 쉽게 지나치는 작은 행복을 발견하는 눈이 있었다. 그에게 막걸리는 비싼 음식이나 특별한 사치가 아니었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소박한 기쁨이었다.
막걸리의 오덕이 가르치는 절제, 생활의 지혜, 활력, 여유와 나눔의 정신은 천상병이 바라본 삶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또한 삼반에 담긴 노동과 서민, 평등의 가치는 그가 평생 지켜온 소박한 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문화적 관점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막걸리는 현대적인 양조기술과 다양한 상품 개발을 통해 새로운 전통주 문화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막걸리의 진정한 가치는 맛이나 유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 잔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작은 즐거움을 발견하는 마음에 막걸리 문화의 본질이 있다.
천상병 시인이 사랑했던 것도 결국 막걸리 자체라기보다 막걸리와 함께 누리는 삶의 소박한 행복이 아니었을까.
막걸리 한 잔에 밥이 있고, 웃음이 있고, 정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천상병의 시 세계와 막걸리의 오덕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삶의 지혜일 것이다.
글 ㅣ임만택 한국아트넷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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