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음악을 듣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LP 시대의 음반은 소리와 함께 한 장의 그림을 소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재킷은 그 음반의 첫인상이자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이번 [이 한장의 음반]에서 소개할 주인공은 브로드웨이 배우이자 뮤지컬 가수인 버나뎃 피터스(Bernadette Peters), 그리고 그의 음반 커버를 그린 핀업 아트의 거장 알베르토 바르가스(Alberto Vargas)다.

특히 1980년 발표된 『Bernadette Peters』와 1981년 『Now Playing』은 음악과 회화가 절묘하게 결합된 음반이다. 두 장의 재킷에는 바르가스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가 담겨 있다.
‘바르가스 걸’을 탄생시킨 알베르토 바르가스
알베르토 바르가스는 1896년 페루 아레키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호아킨 알베르토 바르가스 이 차베스(Joaquin Alberto Vargas y Chavez)다. 그의 아버지 막스 T. 바르가스는 유명한 페루 사진작가였다.

바르가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으로 건너가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191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매력적인 여성 이미지를 그리는 핀업 아티스트로 명성을 얻었다.
그가 그린 여성들은 이른바 ‘바르가스 걸(Vargas Girl)’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으면서도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기보다는 길고 우아한 신체 비율과 매끄러운 피부,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강조했다.
바르가스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40년대 미국 잡지 『에스콰이어(Esquire)』를 통해서였다. 그는 1940년부터 1946년 사이 약 180점의 핀업 그림을 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연합군 항공기에 등장했던 노즈 아트 역시 바르가스와 조지 페티 등 당시 유명 핀업 작가들의 그림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바르가스가 제작한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 캔자스대학교 스펜서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어브러시 기법이다.
바르가스는 수채화와 에어브러시를 결합해 피부와 빛의 미묘한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부드럽고 투명한 피부 표현과 자연스러운 명암은 그의 작품을 상징하는 특징이 됐다.
그는 훗날 에어브러시 기법의 선구자로 평가받았고, 그의 이름을 딴 ‘Vargas Award’가 제정될 정도로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르가스는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미스 유니버스 미인대회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미술시장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1967년 작품 『Trick or Treat』는 2003년 크리스티 플레이보이 아카이브 경매에서 7만1,600달러에 거래됐다.
그가 작업한 유명 인물 가운데는 마릴린 먼로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후기 작품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버나뎃 피터스다.
브로드웨이의 디바, 버나뎃 피터스
1948년생인 버나뎃 피터스는 미국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뮤지컬 가수다.
60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 뮤지컬과 영화, 텔레비전, 콘서트 무대를 넘나들었으며 여러 장의 솔로 음반과 브로드웨이 캐스트 음반을 발표했다.
피터스는 토니상에 일곱 차례 후보로 지명돼 두 차례 수상했으며 명예상도 받았다. 드라마 데스크상에는 아홉 차례 후보에 올라 세 차례 수상했고, 그가 출연한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가운데 네 장은 그래미상을 받았다.
그의 음악 인생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은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Stephen Sondheim)이다.
피터스는 『Sunday in the Park with George』와 『Into the Woods』의 브로드웨이 초연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고, 『A Little Night Music』과 『Follies』의 재공연에도 출연했다.
또한 『Mack and Mabel』, 『Song and Dance』, 『The Goodbye Girl』, 『Annie Get Your Gun』, 『Gypsy』, 『Hello, Dolly!』 등 수많은 브로드웨이 작품에서 활약했다.
버나뎃 피터스의 노래에는 일반적인 팝 가수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에게 노래는 곧 연기다. 가사 한 줄에도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담는다. 한 곡의 노래가 마치 짧은 뮤지컬 한 장면처럼 펼쳐지는 이유다.
1980년 『Bernadette Peters』
1980년에 발표된 『Bernadette Peters』는 피터스가 뮤지컬 캐스트가 아닌 솔로 가수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초기 대표 음반이다.
재킷에는 바르가스가 그린 버나뎃 피터스의 초상이 등장한다. 풍성한 곱슬머리와 붉은 입술, 정면을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흰 꽃이 어우러진 모습은 전형적인 ‘바르가스 걸’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림 한편에는 ‘Vargas’라는 서명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음반 표지를 장식하기 위한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을 넘어 바르가스의 핀업 드로잉 작품 가운데 중요한 하나로 평가된다.
당시 바르가스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노년의 거장이었고, 버나뎃 피터스는 브로드웨이와 영화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한 사람은 20세기 중반의 대중미술을 대표했고, 또 한 사람은 이후 미국 뮤지컬계를 대표하게 됐다. 그 두 시대가 한 장의 음반에서 만난 것이다.
1981년 『Now Playing』
이듬해 발표된 『Now Playing』에서는 바르가스 특유의 핀업 미학이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앞면에는 피터스가 의자에 앉은 채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검은색 시스루 의상과 길게 뻗은 다리, 고개를 돌린 자세는 고전적인 핀업 포스터를 연상시킨다.

뒷면 역시 단순한 곡명 표기가 아니다. 피터스의 전신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수록곡들이 배치돼 있어 하나의 완성된 포스터처럼 보인다.
수록곡에는 ‘Broadway Baby’, ‘Dedicated to the One I Love’, ‘The Weekend of a Private Secretary’, ‘Tears on My Pillow’, ‘Maybe My Baby Will’, ‘I Don't Know Why (I Just Do)’, ‘Mean to Me’ 등이 포함돼 있다.
이를 통해 피터스가 뮤지컬 넘버뿐 아니라 대중가요와 스탠더드 음악을 자신만의 연기력과 해석으로 소화했던 가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Now Playing』이라는 제목은 재미있다.
‘지금 공연 중’ 또는 ‘지금 상영 중’이라는 의미는 평생 무대 위에서 살아온 배우 버나뎃 피터스의 정체성과도 잘 어울린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한 장의 음반
오늘날 음반의 표지는 스마트폰 화면 속 작은 이미지로 소비된다. 하지만 LP 시대에는 음반 재킷 자체가 하나의 전시 공간이었다. 화가와 사진가, 디자이너들은 정사각형의 큰 화면 위에서 음악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Bernadette Peters』와 『Now Playing』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눈으로는 알베르토 바르가스의 그림을 감상하고, 귀로는 버나뎃 피터스의 목소리를 듣는다.
바르가스는 1982년 12월 30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애 후반기에 그린 버나뎃 피터스의 음반 커버는 결과적으로 후기 ‘바르가스 걸’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됐다.
반면 버나뎃 피터스는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브로드웨이와 콘서트 무대를 지켜왔다.
한 거장의 예술 인생이 저물어가던 순간과 또 다른 예술가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순간.
그 절묘한 교차점에 이 두 장의 음반이 놓여 있다.
오래된 LP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단순히 옛 노래를 다시 듣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음악과 함께 그 시대의 미술과 디자인, 대중문화의 기억까지 다시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눈으로 즐기며 듣는 한 장의 음반’이 주는 특별한 매력이다.
글 ㅣ 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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