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궁내부에서 일하던 청년 고희동은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는 밤을 마주했다. 을사늑약이 강요된 뒤 그가 들여다본 ‘궁중일기’에는 ‘궁중무사(宮中無事)’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궁궐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기록이었다. 신간 ‘고희동과 그의 시대’는 이처럼 한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장면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따라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를 다시 만난다.

이상돈이 쓰고 에디터가 펴낸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춘곡 고희동의 삶을 가족과 동료, 당대의 정치·문화적 환경 속에서 살펴본다. 지난 11월 3일 출간됐으며, 500쪽에 걸쳐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 4·19와 5·16에 이르는 시대의 굴곡을 담았다.
책의 이야기는 고희동 개인의 탄생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화기 중인 지식인들의 모임인 육교시사와 고씨 집안의 인물들, 청나라와 미국을 다녀온 아버지 고영철의 행적이 먼저 펼쳐진다. 새로운 문물과 지식이 들어오던 시기,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삶이 고희동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어린 나이에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하고 궁내부 관리가 된 고희동은 이후 그림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다. 책은 그 전환을 망국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걸어갈 길을 찾는 과정으로 다룬다.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전통 서화를 배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화를 공부했고, 1915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최초’라는 수식어 뒤의 길은 단순하지 않았다. 귀국한 고희동은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신문과 잡지에 그림을 그리며 새로운 미술을 사회에 소개했다. 최남선의 주문을 받아 그린 잡지 ‘청춘’ 창간호 표지, 동아일보 창간호를 장식한 도안 등은 그의 활동이 화폭 밖으로도 뻗어나갔음을 보여준다.
책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고희동은 미술가들이 함께 활동할 기반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1918년 서화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전람회 운영에 힘썼으며, ‘서화협회보’의 편집에도 깊이 관여했다. 작품을 제작하는 일과 함께 전시를 열고 기록을 남기며 미술의 사회적 자리를 넓히는 데 나섰던 것이다.
서양화를 배운 그가 다시 전통 회화로 향한 과정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고희동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표현법을 절충하며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책은 그 변화를 둘러싼 고민과 시대적 여건을 살피며,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설명만으로는 담기 어려운 예술적 여정을 짚는다.
고희동 주변의 인물들은 이야기를 더욱 넓힌다. 오세창과 간송 전형필의 만남을 잇는 과정, 미술가와 언론인·교육자들이 맺었던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한 화가의 전기는 근대 문화계의 인물 지도로 확장된다. 작품과 제도,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한국 문화사의 또 다른 풍경이 드러난다.
해방 이후에는 미술계를 이끄는 원로의 모습이 전면에 등장한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인 국전의 준비와 운영, 초대 예술원 회장으로서의 활동, 전쟁으로 무너진 미술계를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 이어진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고희동이 맺었던 정치적 관계와 선택도 함께 다룬다.
4·19 이후 참의원 의원이 된 고희동은 책에 인용된 발언에서 자신을 정치가보다 미술가로 규정한다. 미술가의 대변인으로 정치에 나섰다는 그의 설명은 예술과 사회 사이를 오갔던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다.
이 책의 저자 이상돈은 고희동의 막내딸 고계본의 아들로, 고희동의 외손자다. 가족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선에 고희동과 교류한 인물들의 행적, 미술계의 변화, 정치적 사건을 겹쳐 한 시대의 모습을 구성했다.
짙은 초록색 표지에는 두루마기 차림으로 계단 앞에 선 고희동의 흑백사진이 놓였다. 독자는 그 사진 속 인물을 따라 궁궐과 미술학교, 교실과 전시장, 전쟁기의 부산과 해방 이후의 화단을 지나게 된다. ‘고희동과 그의 시대’는 한 화가가 남긴 작품과 활동을 통해 우리 근대가 어떤 만남과 선택으로 이루어졌는지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책 개요
책명: 고희동과 그의 시대
지은이: 이상돈
출판사: 에디터
출간일: 2026년 11월 3일
분야: 인문사회
쪽수: 500쪽
판형: 152×215mm
정가: 35,000원
ISBN: 978-89-6744-310-8
저자 소개
이상돈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미국 툴레인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30년간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환경법과 헌법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제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고희동의 외손자로, 주요 저서로는 ‘비판적 환경주의자’, ‘미국의 헌법과 대통령제’, ‘공부하는 보수’, ‘시대를 걷다’, ‘시대를 생각하다’, ‘마릴린 먼로와 케네디 형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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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만택 기자 dream-kaz@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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